강대한 기마민족 예맥은 중원 대륙을 지배했다

입력 2018-12-07 20:08:39

원문 링크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중국과 일본의 사서를 보면 너무나 허무 명랑한 이야기를 마치 사실인양 기록하고 있음에 개구무언의 지경이다. 우리 조선족의 계보(系譜)를 보면 1만년 이전부터 대륙에서 시작해 환국․배달국․고조선․숙신씨․예맥․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발해․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이어진 역사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에서 숙신씨(肅愼氏)와 예맥(銳麥;濊貊)에 대해서는 너무나 소홀하게 다뤄지고 있음을 본다. 숙신씨(肅愼氏)는 고조선(古朝鮮)보다도 40여 년 전에 건국한 대국이었고 이 숙신씨와 고조선은 4300여 년 전에 대륙에 건설된 우리가 소홀하게 할 수 없는 나라이다.
 
예맥조선(銳麥;濊貊)은 기자조선(箕子朝鮮)보다도 먼저 3000여 년 전에 건설되고 중국의 동주(東周)시대부터 1천여 년 간, 대륙을 정벌하고 지배한 것이 판명되고 있는 나라이다. 이 예맥조선을 계승한 것이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인 것이다.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부여국(夫餘國)이 예맥(濊貊)의 고지(故地)’라 하고 있다. 진서부여전(晉書夫餘傳)에 그 왕의 인문(印文)에 예맥왕의 인(印)이 있고 국중(國中)에 예맥(銳麥;濊貊)의 성(城)이 있는데 본래 예맥(銳麥;濊貊)의 땅이라 하고, 「삼국지(三國志)」 부여전(夫餘傳)에 선대(先代)로부터 전하여 온 옥벽규찬(玉璧珪瓚)에 예맥(銳麥;濊貊) 왕의 도장(印)이 찍혀 있다고 하였다.
 
또한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예맥(銳麥;濊貊) 노인들이 ‘예맥은 고구려와 종(種)이 같다’고 말하고, 고구려의 일명(一名)이 ‘맥이(貊耳)’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천황(欽明天皇)15년 12월조(條)에 박(狛)이라 칭하였다. 박(狛)은 예맥을 일컬은 것이다.
 
이들 기록은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가 예맥조선(銳麥;濊貊朝鮮)을 계승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중단 없는 1만1000년의 역사를 창조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한족(漢族)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데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가(史家)는 크게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한족(漢族)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 고대에 우리는 중원대륙을 지배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중․고교 교과서 등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우리 조선을 정복하고 우리를 지배하였다고 하는 것은, 허구(虛構)로 그런 사실이 없었다. 한무제(漢武帝)가 우리를 정복(征服)하고 지배(支配)한 사실이 없음은 중국사(中國史)에 명기(明記)되어 있음을 이미 수차례에 걸쳐 밝혔다.
 
오히려 중국이 우리의 지배를 받아온 것은 세계 학자들이 밝히고 있다. 더욱이 중국의 양심적 학자(學者)인 서양지(徐亮之) 교수는 1943년 4월 그의 저서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4천 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중국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苗族)이 점령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漢族)이 들어온 뒤에 점점 더불어 접촉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동이의 활동무대가 실로 오늘날의 산동․하북․발해 연안․하남․강소․안휘․호북지방․요동반도․조선반도의 광범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 산동반도가 그 중심이었다”고 했다.
 
오늘은 한나라와 한족(漢族)이 우리를 지배한 적이 없고 우리가 한족을 지배한 사실과 중국이 우리 역사를 기록한 포박자(抱朴子)를 숨기고 중국 역사로 조작한 사실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흑룡강지고(黑龍江志稿)에 기록한 숙신씨(肅愼氏)와 예맥(濊貊)
 
「흑룡강지고(黑龍江志稿)」第一 地理志, 沿革에는 ‘肅愼者 虞夏以來 東方大國也...濊貊者 商周之際 舊國也’라고 하였다. 즉 숙신씨(肅愼氏)는 4천 년 전에 대국(大國)을 건설하고 예맥(濊貊)은 3천 년 전에 구국(舊國)이라고 한 것이다. 4천 년 전은 동서 민족이 몇 백리에 걸쳐 소부락생활(小部落生活)을 하는 씨족시대(氏族時代)로 이때에 강대(强大)한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우리가 고대부터 강대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민족이 석기시대(石器時代)의 생활을 할 때에 숙신씨(肅愼氏)처럼 우수한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숙신씨는 이미 철을 파괴하는 고시(楛矢) 석족(石鏃)를 발견하고 궁시(弓矢)를 수출하여 무력(武力)이 만 여리(餘里)에 떨쳤다고 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진서각주(晉書斠注 卷97, 列傳 第67 東夷 肅愼氏 註)에도 숙신씨(肅愼氏)는 4천 년 전에 대국(大國)을 건설하여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동쪽 모든 지방을 차지하였다고 하였다.
 
한편 구국(舊國)이라는 예맥(銳麥;濊貊)이 등장한 3000년 전은 구국(舊國)이 없는 시대이다. 동서 모든 민족이 다 몇 백리 소부락(小部落)으로 분립(分立)하여 불합리(不合理)한 감정으로 침략(侵略)하는 전투형(戰鬪型) 시대(時代)이다.
 
그럼으로 모든 부족이 아침에 흥하였다가 저녁에 망하는 무상(無常)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특이한 강대족(强大族)이 아니고서는 오랜 역사를 보존하지 못했다. 그런데 예맥은 오랜 역사를 보존하고 중원대륙을 정벌하고 정복하여 중원을 지배한 강대한 역사를 가진 나라였다.
 
그런데 이 예맥의 역사가 중국과 일본에서 다 지워지고, 우리나라 역사의 계보에도 지워져 있는 상황이다. 이는 중국과 일본이 우리 역사가 대륙의 역사임을 숨기기 위해서이나, 예맥이 그리 지워질 나라가 아니다. 예맥은 인류사상 강대족(强大族)인데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예맥(銳麥;濊貊)이 강대한 나라였다는 것은 중국의 고대지리지(古代地理志)인 「산해경(山海經)」대황동경(大荒東經)에 기록한 유위국(有蔿國)이다. 본래(本來)의 이름은 위국(蔿國)이고, 어조사(語助辭)로서 유자(有字)를 가(加)해서 유위국(有蔿國)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예맥(銳麥;濊貊)은 극히 강대(强大)하여 중원(中原)의 국가를 정벌(征伐)함으로 중국인의 증오심(憎惡心)으로 예맥(穢麥;濊貊)이라는 악명(惡名)을 붙였다는 것이다. 「관자전서(管子全書」 卷11 소핑편(小稱篇)에 ‘예맥(銳麥;穢麥;濊貊)은 흉악하다’고 하였다. 또한 「해동역사(海東繹歷史」第三 맥(貊)에는 ‘공자(孔子)가 예맥(銳麥)에 맥(貉)이라는 짐승의 이름을 붙인 것은 악(惡)을 말한 것이다’ 하였는데 우리는 중국이 악(惡)을 묘사한 국명(國名)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는 이 예맥(穢麥;濊貊)이라는 명칭에 대체(代替)해서 예맥(銳麥)으로 개칭(改稱)해서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최인(崔仁)선생은 이미 밝힌 대로 예(銳)는 예병(銳兵)으로서 천하를 정복한 강대한 모습을 표현한 것이고 맥(麥)은 내한(耐寒)의 곡물로서 한냉(寒冷)한 지대에서 성장한다. 예맥(銳麥)은 북방 한냉(寒冷)한 지방에서 맥(麥;보리)를 상식(常食)으로 하였다고 하였다.
 
즉 예맥(銳麥)이라는 명칭은 곧 보리인 맥(麥)을 먹으면서 예병(銳兵)을 거느리고 천하에 횡행(橫行)하던 본래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고대 우리민족은 인류 사상 최초의 강대족(强大族)으로 등장하고 천민(天民)의 자손으로서 조선을 천(天)으로 받들었다.
 
그런데 반도식민사관자들은 이 천민사상(天民思想)도 말살하고 중국과 일본이 조작하고 왜곡한 식민사관역사가 우리의 역사인양 중국과 일본의 사가(史家)들에 의한 무리한 조작 역사에 취해 우리가 대륙을 지배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더럽히고 있다. 지금은 첨단과학으로도 역사는 다 밝혀지고 있음을 외면하고 있다. (以上은 崔仁 ‘(韓國學講義)’, 62面~64面 參照 引用)하다.)
 
예맥(銳麥)의 정벌, 정복, 지배를 숨길 수 없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맥조선(銳麥朝鮮)은 동주시대(東周時代)인 서기전 770년부터 한무제 재위 전까지 1000여 년간 중국을 정벌하고 정복하여 지배한 사실이 중국사(中國史)에 분명하게 명기(明記)되어 있다.
 
춘추시대에 중국은 이민족(異民族)의 정벌을 받아 거의 멸망 직전의 위기에 직면하였다가 제환공(齊桓公)의 신하 관중(管仲)에 의해 겨우 구출되어 공자가 “관중(管仲)이 없었더라면 중국은 멸망되어 우리가 피발(被髮)하는 되놈이 되었으리라”라고 말하였다.(論語 卷十四, 憲問 第十四,)
 
그런데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중국을 정벌(征伐)한 민족은 예맥(銳麥)이다. 「후한서(後漢書)」에 이 사실을 동이전(東夷傳)에 기입했다고 하였다. 이는 우리민족이 정벌한 것을 말한 것이다.
「시전비궁(詩傳閟宮」9장(九章) 주(註)에 신안호씨(新安胡氏)가 예맥(銳麥)이 노(魯)를 정복하였다 하고 「사기(史記)」에 태사공(太史公)은 ‘연(燕)이 북으로 예맥(銳麥)의 압박을 받아 거의 멸망에 직면 한 때가 수차(數次)’라고 하였다. (史記 三十四, 燕召公 世家 第四 參照 引用).
 
또한 연(燕)이 맥에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는 예맥이 경제적(經濟的)으로도 연(燕)의 상위(上位)에 있는 나라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당시 중원(中原)의 맹주(盟主)가 예맥(銳麥;濊貊)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以上은 崔仁 ‘(韓國學講義)’, 74面 參照 引用하다.)
 
당시 주(周)는 서방(西方) 기마민족(騎馬民族)의 침공을 받아 호경(鎬京)을 버리고 도읍(都邑)을 낙읍(洛邑;낙양)으로 옮겼다. 이 호경(鎬京)에서의 약 330년간 을 서주(西周)라 말하고, 서기전 256년 진(秦)에 멸망하기까지의 514년 간을 동주(東周)라는 것은 이미 서술했다.
 
당시 대륙의 중원천하를 통일한 진(秦)도 예맥(銳麥;濊貊)을 이기지 못하였다. 「자치통감(自治統鑑)」(卷十五, 漢紀七, 太宗孝文皇帝下)에 의하면 조착(晁錯)이 한나라 문제(文帝)에게 글을 올렸다.
 
내용인즉 ‘진(秦)이 예맥(銳麥;濊貊)과 남월(南越)을 공벌(攻伐)한 것은 국경을 방위하고 민중의 죽는 것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넓은 영토를 얻으려는 탐욕을 위한 것이라’ 했는데, 그러나 성공치 못하고 천하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
 
그 이유는 진(秦)은 병사(兵士)에 대한 형세(形勢)를 알지 못하여 예맥(銳麥;濊貊)과 싸우면 적에게 포로(捕虜)가 되고 주둔(駐屯)하면 사병(士兵)이 전멸되었다. 예맥인은 한냉(寒冷)한 지대에서 생활하여 한기(寒氣)에 견디고, 강서(江西)의 월인(越人)은 더위에 잘 견디는 성질이 있는 반면, 진(秦)의 군대는 추위와 더위를 견디지 못하여 예맥(銳麥)에게 패하였다고 하였다.
 
때문에 진(秦)의 백성들은 출전하는 것이 사형장으로 가는 것 같이 두려워 도피(逃避)함으로 죄인을 징발하여 출전케 하니 이것이 소위 적술(謫戌)이다. 이것은 귀향살이 군인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진(秦)이 잘 훈련된 정예(精銳)의 예맥군(銳麥軍)을 이길 수 없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로 인하여 진(秦)나라는 예맥과 남월(南越)의 전란(戰亂)으로 혼란에 빠진 것을 계기로 진승(陳勝)과 항우(項羽)가 진(秦)을 타도하였다고들 하나, 실제로 진(秦)을 타도(打倒)한 것은 예맥과 남월(南越)인 것이다.(以上은 崔仁 ‘韓國學講義’, 74面~76面 參照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예맥(銳麥)은 진(秦)과 한(漢)을 제압한 강대(强大)한 나라다
 
중국인들은 역사적 사실을 잘 모르면서 일방적으로 인류의 종주국(宗主國)이라 자처하며 다른 민족을 신복(臣僕)으로 간주하는 전통이 있다. 이는 우리 역사와 중국의 역사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인데 이는 역사조작(歷史造作)으로 우리 민족이 대륙을 지배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 반도식민사관자들도 진(秦)과 한(漢)이 대단히 강력한 나라였다고 말하나 이는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기(史記)」에 보면, 한 고조의 동향인으로 한 고조의 부(父)와 친한 노관(盧綰)이 한 고조와 생일이 동일하다해 한 고조가 천하를 얻은 후 노관(盧綰)을 연(燕)나라 왕으로 임명했다. (史記 卷之九十三, 列傳) 第三十三 參照 引用하다).
 
그런데 이 노관(盧綰)이 그 신하로 있던 위만(衛滿)과 같이 배반하자, 한(漢) 고조(高祖)가 이를 토벌하였다고 한다. 노관(盧綰)이 한 고조를 배반해 반란(反亂)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흉노(匈奴)로 위만(衛滿)과 같이 망명(亡命)했다고 한다.
 
이 노관(盧綰)이 덕망과 선치(善治)가 없고 한 고조의 신임을 얻지 못하니 밖으로 예맥(銳麥)을 등에 업고 반란(反亂)을 일으키다가 실패하고 흉노(匈奴)에 도피하였다고 한 것이다.
한편 「한서(漢書)」에는 ‘고조(高祖) 4년 북적연인래치효기 조한(北狄燕人來致梟騎 助漢)’이라 하였다. 즉 한 고조 4년에 예맥이 용감한 기병을 보내어 한(漢)을 도와주었다고 한 것이다.
 
노관(盧綰)과 위만(衛滿)이 예맥(銳麥)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킨 것과 한 고조가 예맥의 군사적 원조를 받은 것은 당시 예맥(銳麥)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예맥이 한나라보다도 국력이 강대한데 위만이 예맥(銳麥) 등 우리 민족을 지배하였다는 것은 분명 위조이고 조작이다.
 
반란(反亂)에 실패한 위만(衛滿)이 조선(朝鮮)에 망명(亡命)할 때에 조선의복(朝鮮衣服)을 입고 조선인(朝鮮人)의 상투를 곡 지었다. 이는 예맥(銳麥)을 배경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위만(衛滿)이 조선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조선인을 가장(假裝)한 것이다.
 
조선족을 가장하고 조선인의 보호에 겨우 생명을 보존한 위만이 세운 정권은 한 지방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미약한 존재인데 강대한 예맥을 정복하고 우리를 지배할 수는 없다.
 
허위조작으로 정평이 나 있는 중국의 역사를 고찰 할 때면 문면(文面) 그대로만 믿는 것은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은 것을 제대로 보여 주는 것이다. 중국 역사를 면밀히 바로 검토하면 한(漢)이나 위만이 우리 민족을 지배하지 못한 것이 확실해진다.
 
그런데 위조되고 조작된 역사만을 가지고 역사를 논하는 것은 역사의 무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일 뿐, 역사라 할 수 없다. 더구나 중원을 정벌하고 정복하여 천년을 지배한 예맥의 역사를 숨기고 말살한 것은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다. ‘예맥사’의 매장은 비극으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 고조를 도와준 강대한 예맥이 위만을 책동하여 한 고조를 배반케 한 강대한 예맥을 버리고, 반란에 실패해 겨우 생명을 보존한 미약한 이민족(異民族)인 위만을 중심으로 한국사를 엮어놓은 것은 식민사관자를 탈피하지 못한 구태이다. 외국의 학자들도 이를 믿지 않는다.
 
우리나라 국정교과서에도 ‘한의 무제(武帝)가 우리민족을 정복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는 중국사의 위조(僞造)를 그대로 번역하여 한무제(漢武帝)가 우리민족을 지배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나라의 무제는 우리를 지배한 적이 없다. 사실을 왜곡한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주은래(周恩來, 1898~1976)는 1963년 6월 28일 중국을 방문한 북한조선과학원대표단 20명과 만난 자리에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부합되지 않으며 이는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의 대국쇼비니즘(국수주의)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라 했다.
 
그는 생전에 중국의 국수주의의 역사 왜곡을 경멸했던 주은래(周恩來) 총리는 거인답게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였다”며 역사왜곡(歷史歪曲)의 근본책임이 중국에 있음을 시인했다.
 
우리는 조작된 역사의 검증(檢證)에 앞서 고증을 통하여 역사를 바로 보아야 한다. 세계 석학들도 다 같이 우리가 기자와 위만, 한 무제가 우리민족을 정복하고 지배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예맥은 한(漢)이 설치한 한사군까지 흡수했다.
 
한 무제(武帝)가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후 예맥이 한사군중 낙랑군을 제외한 진번(眞番), 임둔(臨屯)을 탈취하고 현토군(玄菟郡)도 대부분 흡수하였으나 한(漢)은 이를 관장하지 못했다.
 
예맥은 동주시대(東周時代)부터 한 무제시대(武帝時代)까지 중국에 남출(南出)하여 한족(漢族)을 정벌(征伐)하고 정복(征服)한 사실은 예맥이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 한사군보다 강대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반면 기자조선은 40여대 계승되었다고 하나 그 실체가 없는 허구이다.
 
기자는 중국인 5천명을 데리고 공한지(空閒地)에 중국인의 집단인 기자조선을 건설하고 그 지배자가 되었을 것이다. 허위 조작하는 중국사가(中國史家)와 우리나라 사대사가가 일제의 이 같은 기자조선을 허위 선전하여 기자가 우리를 지배하였다는 것은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기자조선은 역사적 기록이 없다. 이는 망명정권으로서 유명무실한 존재이고 한반도에 없고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허구의 정권일 뿐이다. 기자는 중국 남쪽의 서화(西華)에서 살고 그 무덤도 중국에 있다. 어찌 한반도에 기자조선을 운운(云云)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한 위만(衛滿)이 노관(盧綰)의 부하로서 한고조(漢高祖)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노관(盧綰)과 같이 조선에 망명하였다. 즉 노관(盧綰)과 위만(衛滿)이 예맥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키다가 흉노에 도피하였다고 한 것이다. 이는 사기꾼 위만이 망명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맥조선은 이들을 지배하고 예속하였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에 위만이 기자의 40여대 손인 회(淮)를 계승하여 조선 왕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들은 순수한 한인(漢人)집단으로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한사군도 한인(漢人)집단으로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당시 천하를 호령하는 예맥이 엄연히 존재한 사실을 고찰하면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등 한인(漢人) 집단이 우리 영토를 엿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이들(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이 우리 민족의 영토를 넘볼 수도 없고 지배는 말할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것을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36년간 심어놓은 식민사관을 탈피하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역사를 제대로 봐야 한다. 우리가 유라시아 중원의 주인일 뿐 아니라 세계의 중심국가였던 것을 바로 알고 말을 해야 한다. 우리역사는 시초부터가 대륙의역사이다.
 
반도식민사관 자들은 우리가 중원은 물론 유라시아를 주름잡은 민족임을 제대로 알고 말을 하라! 고 또다시 말을 하게 된다. 우리는 천손민족으로 대륙과 한반도는 물론, 세계역사의 주역이었음을 바로 알고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역사를 가진 민족인가를 제대로 알고 말하라.
 
고대 사방(四方)민족 중 높은 문화를 가지고 강대한 국력을 가진 자는 오직 우리민족뿐이었다.
 
지금 세상은 거짓이 통용(通用) 안 되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진실을 외면하고 참된 역사를 뒤집어놓는 어리석은 구태(舊態)는 이제 그만 버려야 할 때다. 우리나라 사학계는 정상이 아니다. 이래서는 국가의 장래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더 이상 그대로 방관은 용납이 안 된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의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東夷歷史 ’. (右犂)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九犂系, 新羅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日本史’.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김동락, ‘천부경과 문디, 거시기’. 황순종,‘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이강민,‘대한국고대사’.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李進熙’ ‘好太王碑’. ‘石井進外3,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歷史’. 石井進外3,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延長-, ‘古代日本史’. 秋山謙藏, ‘日本歷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べる日本史’. 杉山徹宗, ‘眞實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歷史.,. 李民樹,'朝鮮傳‘.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
 
이을형 필진페이지 +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4
감동이에요
0
화나요
1
슬퍼요
0
댓글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