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백제의 한성(漢城)이 황하유역에 있었다. 황하는 한수(漢水)·진수(晉水)·면수(沔水) 등으로 불린다.(史記卷二 本紀十五). 이러한 것은 이미 다루었다. 그리고 고구려 평양 및 장안성(長安城)은 하북(河北)에 있었으며, 한성(漢城)은 49년, 654년 모두 태행산맥 동쪽에 있었다.
또한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에는 왜인(倭人)이 왜(倭)로 나오는데, 「신당서(新唐書)」 권(卷) 220에는 일본전도 함형원년(670년) 야마토정권(大和政權, 396~669년) 이후에 일본국호(日本國號)를 쓰게 되었다. 이것은 한문(漢文)을 배워 왜(倭)라는 말이 싫어서 제정되었다고 일본의 카히라코라(賀嘉平高麗)라는 일본인이 말하였다고 한다.
즉, 왜(倭, 衛)가, 동북 회계(會稽), 동남 대만(臺灣), 서북 담이(儋耳;廣西省), 서남 주애(朱崖, 해남도(海南島) 사이에 있음이 확인된다. 그 이웃에 진번(眞番)이 있음을 「사기(史記)」 卷七, 前漢 卷七)에 나와 있고, 이 지도는 숭실대학(崇實大學) 박물관(博物館)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대만(臺灣, 日本)의 기록(記錄)을 1404년 명(明)나라는 일본열도(日本列島)로 하게 한다. 즉 명(明)은 1403년 조작된 왜인전(倭人傳)을 일본에게 건네준다. 그것은 우리 역사를 대륙에서 밀어내기위해서 그대로 일본으로 하여금 왜곡하게 한 것이라 본다. 이런 일은 많다.
예컨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주시경(周時經) 선생이 ‘한글’로 한 것과 같은 것이고 세종대왕(世宗大王)이 360권 책을 참고하여 만든 「의방류치(醫方類治)」를 일본이 가져가서 「고방류치(古方類治)」로 고쳐서 일본이 저술한 것 같이 위조(僞造)한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지명(地名)과 지도(地圖)와 역사에 익숙해져서 원명(原名) 그대로를 말하지 않고 원명(原名)을 고친 것을 선호하는 것 같다. 예컨대 388년 김부식(金富軾)이 쓴 「삼국사(三國史)」를 「삼국사기(三國史記)」로 고친 것을 선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조선조 영조대왕(英祖大王) 때까지도 「삼국사」로 부르던 것을 1908년 「삼국사기」로 고치니 이후 「삼국사(三國史)」를 「삼국사기(三國史記)」로 하는 것이 일반화되어서 「삼국사기」를 선호하고 있다.
지금 「삼국사(三國史)」는 보물 525호에서 국보(國寶) 322-1·2로 등재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三國史)」를 연구를 해 오신 오재성 우리역사연구원 원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 국보를 제대로 연구하는 학자가 10명 내외라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연구(歷史硏究)의 현실을 알게 되니 참혹하다. 오늘은 전쟁사에 빛나는 승리의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가 대륙 역사의 주인임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구려·백제·신라·가라(加羅, 伽倻)도 대륙에 있었다
가라(加羅)는 왜(倭)와 함께 양자강 유역의 국가였다. 고려 이전에는 가라(加羅)·가야(伽倻)·가락(駕洛)으로 나타내고 있는 나라이다. 현재까지 가라(加羅, 伽倻)는 반도에 있다고 하고 있으나 아니다. 가라(加羅, 伽倻)는 대륙에 있었다. 사서(史書)에선 왜(倭) 항목에서 시작한다.
송서동이왜(宋書東夷倭) 항목의 내용에 백제(百濟)·신라(新羅)·임나(任那)·진한(秦韓)·모한(慕韓) 속에 있으며, 「남제서(南齊書)」에만 가라항목((加羅項目)이 있을 뿐이기에 잘 모르고 있다.
왜(倭)에 가라가 포함된 기록은 송서왜(宋書倭), 남제서왜(南齊書倭), 남사왜(南史倭)에 있으니 왜(倭)와 가라(加羅)는 같은 지역에 있어야 할 것이다. 가라(加羅)의 연구는 가라국사(伽羅國史)와 통치자의 가계(家系)를 함께 연구하여 국사(國史)와 가계사(家系史)가 일치해야 한다.
한족(漢族)의 동이기록(東夷記錄)과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가라(加羅)가 있는데 공통부분은 서화(西華)에서 요하(遼河)까지 사이의 기록이다. 즉, 회계담이(會稽儋耳)와 남월(南越)의 왜(倭), 강회(江淮)의 신라(新羅), 요동(遼東)의 백제(百濟)에 의해서 반도기록이 아닌 서화(西華)동쪽의 가라(加羅)인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락국기(駕洛國記)는 잘못된 것이다.
일연(一然)은 김유신(金庾信)을 반도에 가져오기 위해 반도(半島)에 가락국(駕洛國)을 만든다. 그는 1100년 소동파(蘇東坡)가 왜곡한 송본(宋本) 「지리지장도」를 3번 보고, 신라(新羅)와 가락국(駕洛國)을 만들며 대륙의 고구려, 백제를 없앴다. 이에 맞춘 것이 신채호(申采浩) 선생이다.
당시 소동파(蘇東坡)는 3편의 논문에 ‘고려사신(高麗使臣)에게 책을 팔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왜곡한 지도(地圖)와 왜곡한 기록이 들통나기 때문이다. 한편 김부식(金富軾)은 왕에게 글을 올릴 때, 지나(支那) 역사는 잘 아나, 우리나라 역사는 모른다고 했다고 한다.
김부식(金富軾)과 신채호(申采浩)는 결과적으로 「삼국사(三國史」 권(卷) 46의 기록과 「남제서(南齊書)」 권(卷) 58의 기록을 연구치 않고 지명과 지도를 동서 앞뒤로 바꿔서라도 반도에 맞추도록 해 우리의 대륙 역사를 망치게 한 장본인들이 되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5세기 이전 신라(新羅)·백제(百濟)·왜(倭)·가라(加羅)는 서화(西華) 동쪽에만 있었고, 반도에는 고구려가 있었는데 이를 숨기고 왜곡하고 있는 것을 중국사서(中國史書)에서도 다 입증(立證)되고 있다. 헌데 언제까지 허구(虛構)의 역사를 고집하려는지 한심한 일이다.
이미 다 살펴 본 대로 반도에는 서기 32년부터 503년까지 고구려 칸(干)인 거서간(居西干), 또는 마립간(麻立干)으로 불리는 고구려 칸(干)이 다스린 서라벌 신라가 있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또한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반도 남부지역에 구칸(九干)이 있었다 한다.
이 9칸(干)은 마립간(麻立干)과 같은 동위(同位)의 지도자이기에 경상도 지역에서 가라의 명문이 새겨진 9개의 금관이 나와야 마땅한 것인데 지금까지 출토되지 않은 이상 반도에 9칸(干)은 없었고, 가라는 왜와 같이 양자강 유역에 있었던 것을 왜곡하여 반도에 있다고 한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한 신라(新羅)·백제(百濟)·왜(倭)·가라(加羅)는 서화西華) 동쪽의 기록으로 이를 반도로 옮길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상고시대부터 9세기까지 우리민족이 지배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남아 있는 사서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중국25사」의 동이(東夷)와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碑)도 우리가 대륙을 지배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우리 역사를 나약하고 다른 나라의 침입만 받은 것 같이 일제가 왜곡했으나 이는 다 허구의 변조된 것에 불과하다.
삼국(三國)에 대한 사서(史書)로는 「삼국지(三國志)」 권(卷) 40, 「후한서(後漢書)」 권(卷) 85, 「남제서(南齊書)」 권(卷) 58, 「구당서(舊唐書)」 권(卷) 99, 「신당서(新唐書)」 권(卷) 220을 보면 명백해 진다.
(以上은 吳在成,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70面~80面)을 參照,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고대 대륙의 강자(强者)는 우리 기마민족이었다
역사시대의 중국의 최고국가(最古國家)라 할 수 있는 은(殷)은 서기전 1600년 경 부족국가(部族國家)의 연합체(聯合體)로서 화북일대(華北一帶)를 지배(支配)한 나라였다. 그러나 이 은(殷)도 우리 동이족(東夷族)인 유목민의 한 분파(分派)가 세운 나라라고 일본학자도 보고 있다.
은(殷)도 기마민족(騎馬民族)에 의해 시조(始祖)부터 11대 탕왕(湯王)에 이르기까지 8번이나 천도(遷都)를 했고, 탕왕(湯王)으로부터 19대에 해당하는 반경(盤庚)까지 5번이나 천도(遷都)를 해서 도합 13번이나 천도를 한 것은 당시의 기마민족이 대륙을 정벌하고 정복한 것과 무관치 않으며 또 하나는 신(神)에게 제사지낼 때 양(羊)을 희생 제물로 한 점을 들고 있다.
은(殷)은 각종 축제(祝祭)에서 반드시 동물(動物)을 제단 앞에 희생의 공물(供物)로서 올리고 있었다. 그것도 당초는 양·소·돼지였다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앙숙의 적(敵)이 된 강족(羌族)을 붙들어다가 희생의 재물로 한 점이다. 여기서 은(殷)도 원래 유목민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은(殷)으로 보면 강족(羌族)의 압박(壓迫)에 의해서 천도(遷都)를 하게 된 원한(怨恨)이 깊고 이 때문에 제단의 희생 공물(供物)로서 양(羊)대신 강족(羌族)의 머리를 올리게 된 것이었다.
이 일은 유명한 은허(殷墟)나 구 수도를 발굴하면 반드시 강족(羌族)의 머리 없는 유체(遺體)가 나오는 것으로 증명되고 있다. 은허(殷墟)의 서북부에 ‘제사갱(祭祀坑)’이라고 부르는 묘(墓)가 250기 정도 발견되었는데 한 개의 갱(坑)에 8~10개의 목이 절단된 인골이 발견되고 있는데 아직도 미 발굴(未發堀)한 것을 포함하면 2000이 넘는 유체(遺體)에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중국 4천4백년 역사상 가장 강대한 시대가 진(秦)·수(隨)·당(唐)시대이다. 이 나라들은 대륙을 정복했다. 그런데 예맥은 대륙에 있는 기자조선보다 먼저 건설하고 위만조선 한사군과 병립(竝立)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과 일본은 우리가 한족(漢族)의 지배를 받은 것 같이 조작했다. 그러나 우리가 한족(漢族)을 정벌·정복·제압한 것이 중국역사에 의해 판명된다.
우리민족은 고대 한족(漢族)의 지배를 받은 일이 없다. 한족과의 1승1패의 쟁패전(爭覇戰)을 전개하고 그 쟁패전(爭覇戰)에서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승리한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예맥(銳麥, 濊貊, 조선(朝鮮)은 다 지웠으나 예맥은 1천년 동안 대륙을 지배했다고 하고 있다.
중국의 4천4백년 역사상 가장 강대한 시대가 진(秦)·수(隨)·당(唐)시대인데,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진(秦)은 처음 중국을 통일하여 국위(國威)를 떨침으로 중국(中國)을 지나(支那)라고 부르게 한 나라이다. 즉 진(秦)은 중국(中國)을 대표한 명칭(名稱)이기도 하다. 진(秦)은 중국 역사상(歷史上) 가장 강대하고 세계에 보기 드문 대제국(大帝國)이었다.
외국인(外國人)들이 중국(中國)을 부를 때에 지나(支那)라고 부르게 된 것은 시황제(始皇帝)가 건국한 진(秦)에 있다. 중국인이 자칭(自稱)하는 중국(中國)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중앙의 나라라는 의미다. 그리고 중화(中華)란 중국인이 자국(自國)을 부를 때의 미칭(美稱)인 것이다.
그런데 시대는 내려가는데 3세기 말 몽강(蒙疆)의 제민족(諸民族)과 티베트족이 대거 해서 4세기~5세기 경 한족(漢族)의 거주지를 정벌해서 소위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가 3백 년 동안 남북조(南北朝)로 분열시켰다. 이 남북조(南北朝)를 통일시킨 나라가 수(隨)나라이다.
이 수(隨)나라 역시 특기(特記)할 강국(强國)이었다. 그런데 당(唐)은 수(隨)보다도 더 강대했다. 중국 역대 제왕(帝王) 중, 제일인자(第一人者)로 칭하는 당태종(唐太宗)은 주변의 모든 나라들을 정복하고 예속(隸屬)시키며 강대한 제국(帝國)을 건설한 것은 부인하지 못한다.
즉 북으로 돌궐(突厥)·고창(高昌)·토곡혼(吐谷渾)·설연타(薛延陀)를 정복하고 철륵(鐵勒)·회흘(回紇)을 예속시킨다. 이 회흘(回紇)은 문자가 있고 당(唐)에 공주(公主)를 시집보낸 강대족(强大族)인데 이 회흘(回紇)마저 정복하여 당(唐)을 대적(對敵)할 나라는 없는 것 같이 보였다.
당태종(唐太宗)은 주위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예속(隸屬)시킨 후에 ‘설치수백왕, 제흉보천고(水)(雪恥酬百王, 除凶報千古)’라는 자찬(自讚)의 시(詩)를 짓고 당태종의 신하 조우(祖禹)는 ‘천지개벽(天地開闢)한 후 전무(全無)한 공을 세웠다’고 찬양했다. (唐鑑 卷六, 太宗四), 이같이 당(唐)은 중국 역상으로나 세계 사상 기록할만한 자타(自他)가 인정하는 강국(强國)이었다.
그러나 예맥이 사실상 진(秦)을 타도하고, 고구려가 수(隨)를 격파하고 당(唐)을 격파한다. 이것은 우리민족이 중국 역사상 가장 강대한 진(秦)·수(隋)·당(唐)을 제압한 것이다. 우리는 한족과의 쟁패전에서 승리한 것이다. 진(秦)·수(隨)·당(唐)은 동양의 패자이나 이 패자를 제압한 우리가 동양의 제패다(制覇者)이다. 이런 강국을 중국의 지방정권이라 함은 기가 찰 노릇이다.
중국은 대륙(大陸)에 있는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우리를 반도로 옮기는 작업을 끈질기게 해 왔음에도 이것도 모자라, 또다시 동북공정을 하며 고구려·백제·신라·가야(伽倻)를 대륙에서 반도로 옮기고 왜(倭)는 일본열도(日本列島)로 옮기면서 당(唐)과 명(明)이 국호(國號)를 왜(倭)에서 일본(日本)이라고 쓰게 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변조하나 그렇다고 역사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머지않아 우리의 옛 고토(故土)를 다물(多勿)하는 날도 않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九犂系, 新羅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倭-日本史’. 吳在成 編著, ‘지도로 보는 우리나라역사(東夷疆域圖)’.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김동락, ‘천부경과 문디’ 거시기’. 황순종,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이강민,‘대한국고대사’.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石井進外3人,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 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石井進外3人,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學べる日本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上.中,下. 李民樹,'朝鮮傳‘.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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