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해서 대륙역사를 반도역사로 보는가!

입력 2019-01-19 01:3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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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지금 우리나라의 역사의 사정을 보노라면 제2차 대전 후에 바꿔야 하고 바로 세워야할 역사 사관이 달라지지 않아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는 사회 현상과 연관이 있다. 일제(日帝)의 참혹한 질곡(桎梏)에서 광복이 되었는데도 무엇 하나 변하지 않고 있는 것과 같다.
 
일제에서 벗어났으나 정치를 비롯해서 모든 면에 제대로 바로 해야 함에도 바꿔진 것이 없다. 여전히 분열의 정치, 생기 없는 경제와 활력을 잃은 사회현상이 낳은 결과라 할지모르나 필자가 보기에는 우리 지도자 가운데 애국심(愛國心)의 결여(缺如)’가 가장 큰 문제로 보인다.
 
애국심(愛國心)은 근대 절대주의시대에는 국왕(國王)에 대한 충성이 애국심이고, 근대민주주의시대에는 국가=국민국민에의 사랑=애국심으로 봤으며, 현대는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발전을 동시에 실현시키는 인류애(人類愛), 평화(平和)와 모순되지 않은 애국심이 애국심으로 부각됐다.
 
그런데 정치인이나 경제인이나 학자까지도 애국심보다는 이기적 타산에 그 진수(眞髓)를 잃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할 때가 많다. 정치인은 물론이고, 경제인도 이윤추구만을 생각한 나머지 애국심은 찾아보지 못하는 기업가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사학계(史學界)도 역사마저 팔아먹고 있는 사학자(詐學者)로 역사가 뒤엎어진 점, 이제 우리도 선진 국민답게 바로 달라져야 한다.
 
한편 반도식민사관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재야학자들의 발표한 여러 내용을 보면 충격을 금치 못한다. 그것은 역사를 바로 잡는 정론(正論)’으로 바른 눈과 곧은 논단을 자부하는 신문이라 자처하면서 거기에 게재된 내용에는 잘못 알고 미흡한 것들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살수(薩水)를 청천강이라는 것과 패수(浿水)를 대동강이라 하는가 하면, ()이 마치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지배한 것 같이 말하고 백제의 첫 도읍지는 유물이 나왔다고 나주(羅州)라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백제의 첫 도읍지는 하남 위례성이라는 주장에 놀라움을 금치 못 한다.
 
우리의 고대국가들이 다 대륙에서 건국하고 대륙을 지배한 것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는데 크게 실망하게 된다. 단군무덤이 없다고 평양에 단군릉을 만들고 거기서 지난103일 개천절이라 참배하는 북한의 사진을 보며 마치 단군이 반도 평양에서 건국한 것 같이 보도 하고 있다.
 
대륙에서 건국한 고려도 반도에서 세운 것 같이 말하는데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오래 동안 역사 연구하신 선생님의 대화에서 환관(宦官)이 청나라 때부터라 하시는데 수긍 할 수 없었다.
 
우리역사를 바로 하려고 노력하는 선생들도 이런 실수를 하는데 일반시민들이야 말을 해서 무엇 하겠는가! 우리 역사가 대륙역사임을 모르고 있다는데 크게 놀랐고 충격이었다.
오늘은 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의 주장들을 다른 시각에서 그 주장이 아님을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에 전 왕조유품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
 
중국에서는 왕조를 넘어뜨린 신왕조(新王朝)의 왕이나 황제는 전 왕조에 소속하는 인간을 철저하게 살육하는데 그치지 않고 건물이나 비품, 미술품과 분묘(墳墓)에 이르기 까지 전 왕조의 영향이나 보호를 받는 모두를 파괴 대상으로 했다. 이로 인하여 인구도 격감(激減)했다.
 
왜냐하면, 왕조의 사람과 물건을 완전히 부정함에 의해서 신왕조(新王朝)와 구왕조()王朝)의 다름을 국민에게 나타내는 것이 지배상(支配上) 필수조건으로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원이나 역사적 건물도 파괴되어 만리장성(萬里長城)과 같은 것이 겨우 파괴를 면할 정도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옛날부터 민족에게 전하여지는 각종의 민요(民謠)가 있는데 4천년 이상의 중국에 남은 것은 밭에 모를 심으며 노래하는 앙가(秧歌)’ 밖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이다.
 
앙가(秧歌)’900백 년 전의 송()시대부터 불러진 모를 심는 노래이다. 우리나라는 농촌(農村)과 어촌 목축을 다루며 부르는 노래 등 다양하나 중국은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 원인은 왕조를 무너뜨린 후 살육(殺戮)을 하기 때문에 우수한 악기(樂器)를 다루는 사람이나 연주(演奏)하는 사람과 가수(歌手)가 사라진다. 왕조가 멸망할 때는 죽임을 당하든가 하기 때문에 숨어서 다시 그 능력(能力)을 발휘(發揮)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중국에서 부르는 아악(雅樂), ()나라시대에 궁정(宮廷)에서 연주(演奏)된 서북의 위굴족(回鶻族)의 음악(音樂)으로서 중국고래(古來)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는 우리와 대조를 이룬다. 중국은 왕조교체(王朝交替)가 있을 대마다 수천만 인의 살육(殺戮)을 자행(恣行)했다.
 
중국의 인구변천의 추이(推移)에 의해서보면 서기 2년 전한시대 인구가59,594,9786천만이었는데 서기57년 후한(後漢)인구는 2,100,000이었다. 55년 동안에 약4000천만이 사라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농업노동의 주역인 남자가 차출(差出)되어 농지가 황폐해지고 대기근(饑饉)과 자연현상에서 수백만 인구가 기근(饑饉)이나 홍수(洪水)로 사망도 하겠으나 이것보다도 중국에서는 춘추시대부터 2000년 이상에 걸쳐서 자민족을 대량 살육(殺戮)을 한 것이 문제였다.
더욱이 중국에서는 때때로 양군(兩軍) 합쳐서 100만인, 많을 때는 200만인이 넘는 대규모의 대회전이 행해지기 때문에 승자라 해도 수십만이 사망하고 패군이 되면 40~50만의 병사가 살해되는 일도 때때로 있었다. 지금도 고전장적(古戰場跡)에서 인골이 나온다.
 
전국시대 말기 진군(秦軍)과 조군(趙軍)이 대회전(大會戰)을 한 장평(長平) 싸움에서는 진군(秦軍)이 대승을 하여 조군(趙軍)40만 병사(兵士)가 항복하나 진()은 그들을 모두 생매장해 버렸다.
 
또 후에 진()을 정복한 항우(項羽)도 항복한 진군(秦軍) 20만명을 생매장했다. 이러한 잔혹한 살육은 우리 역사에서는 볼 수 없는 잔혹함이었다. 후한을 망하게 한 조조(曹操)도 대군을 움직인 장군들은 싸움에 이기고서 위험하고 식량이 없다는 이유에서 생매장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풍토에서 서기전 770~서기전 403년까지 춘추시대가 367년간 계속 된 것도 살기 위해서는 싸우는 길 밖에 없음에서 오호(五胡)16국도 춘추시대에 제국은 항쟁을 계속한 것이 아닌가 여기게 된다. (以上杉山徹宗, ‘眞實中國四千年史’ 58~73面 參照, 引用).
 
환관(宦官)은 고대부터 궁중에 쓰이고 있었다.
 
우리 상고사를 오래 연구해온 분이 환관제도는 청()나라 때부터 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일본서책(書冊)에도 환관제도(宦官制度)는 중국이 먼저 쓴 제도라고 보는데 그러지 않음을 밝히고 가겠다. 이 제도는 오래 전부터 아시아의 유목민족과 유럽의 유목민족(遊牧民族)의 여러 나라에 존재하였다. 중국에 있어서도 고대부터 중세(中世)에 특징적인 제도 중 하나가 환관제도였다.
 
중국에서는 은대(殷代)로부터 20세기 초두(初頭)의 청시대(淸時代)까지 연면(連綿)으로서 계속되고, 그것도 크게 성행한데 특징이 있다. 국력이 안정화 되고 왕의 권력이 강대해진 은()나라에서는 22대왕인 무정(武丁)의 시대가 되니 44명의 여자를 소유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궁정(宮廷) 내부, 황제의 주변에서 환관(宦官)이 여성 노예를 웃돌게 되자 후궁의 후비(后妃)와 성적관계(性的關係)를 갖지 않은 중성(中性)의 노예(奴隸)가 필요하게 됐다. 거기서 남성의 성기(性器)를 절제(切除)한 환관(宦官)이 필요하게 된 이유로 환관들이 생기게 됐다.
 
그래서 은()은 강족(羌族)의 포로를 성기(性器)를 절제(切除)하여 남성(男性)의 성기상실(性器喪失)시켜서부터 은왕족(殷王族)의 가내노복(家內奴僕)으로서 사역(使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기독교의 수용(受容)과 함께 폐지되었다. 그리고 은()에 있어서는 범죄자에 대한 형벌로서 남성성기절제(男性性器切除)가 행해져, 궁형(宮刑)도 대대(代代)의 왕조(王朝)에서 계속되어 왔으나 수()나라 이후 범죄자에 대한 궁형(宮刑)은 금지되었다.
 
중국역대왕조의 환관의 수는 주()에서는 수백인 이었으나,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서 증대하여 당()시대에는 4천인 정도였는데, ()나라 말기(末期)에는 1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의 경우도 1653년에는 9000, 건융제(乾隆帝)에는 2800, 선통제(宣統帝)가 퇴위하는 1911년에도 800인을 셀 수 있었다. 이 환관과 외척(外戚)은 중국정치를 좌우하기에 이른다.
이들 환관은 남성으로서의 기능을 빼앗긴 대신에 궁정 깊숙이 왕후(王后)나 여관(女官)들의 측근의 시중을 들 수 있기 때문에 황제권력(皇帝權力)에 들어가는 것이 비교적 용이(容易)했다.
 
그 때문에 때로는 국가의 정책결정에 참획(參劃)하여 극단적인 경우에는 황제 권력의 대리인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야망(野望)에 불타서 스스로 거세(去勢)하는 자궁자(自宮者)가 끊이지 않았고, 시대에 따라서는 이민족(異民族) 포로의 환관을 상회(上廻)하는 때도 있었다.
 
단지 권력(權力)을 장악(掌握)한 환관(宦官)은 대개의 경우 권력자(權力者)나 왕조(王朝)가 교체(交替)하는 경우, 숙청(肅淸)에 처()해지는 경우가 많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 자도 많았다.
 
유라시아 대륙의 민족은 고대부터 전차나 하차(荷車), 때로는 사람을 운반하기 위해 말이나 소()를 이용했으나 거칠지 않고 힘이 센 숫 우마의 성기(性器)를 거세(去勢) 해서 이용해 왔다.
 
그런데 일본에서 우마를 거세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우마를 키우지 않았기 때문이고, 남성의 성기를 절단해서 환관을 하는 일은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소와 말을 키우지 않은 것과도 관련이 있다.
 
일본은 가야시대 말을 처음 가져갔고 소고기를 먹기 시작 한 것도 명치유신 이후의 일이다.
(以上杉山徹宗, ‘眞實中國四千年史’ 51~53面 參照하고, 本文引用함을 밝힙니다.)
 
한사군(漢四郡), 한반도에 설치한적 없다.
 
우리나라 삼국사가 마치 한반도에 있었던 것 같이 말을 하는 강단학파와 일부 재야학자들도 있는데 반도에 없었다. 그리고 살수(薩水)가 청천강이고 패수(浿水)가 대동강이고 백제의 첫 도읍지가 경기도 하남시의 위례성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 지명들은 모두 대륙에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수차 밝혔기에 다시 논하고 싶지 않으나 분명히 다시 이를 다시 말한다면 상고시대나 고대, 삼국과 발해(渤海), 고려(高麗), 조선조(朝鮮朝)도 반도에서 건국하지 않고 만주남부를 포함해 건국했다. 제대로 연구를 하지 않고 섣불리 말하는 풍조는 이제 바뀌어야 한다.
 
고려도 요동반도와 하얼빈 남쪽이 고려 영역이고 수도도 대륙의 심양(瀋陽)이지, 반도의 해주(海州)나 평양(平壤)이 아니다. 심양왕(瀋陽王)과 관련이 있어 심양왕(瀋陽王)으로 부르는 것과 같이 심양(瀋陽)으로 보고 있다.
 
황성(皇城)이 서경(西京)으로 무순 등 이곳은 모두 고려 영역이다. 조선조도 이성계 장군이 쌍성총관부를 평정하고 통괄한 것은 조선의 건국도 반도만이 아님을 바로 알고 말을 해야 한다.
 
중국은 우리 역사를 변조하기 위해 우리의 강역과 지명을 수없이 옮겼는데 일본은 양자강 이남과 대만(臺灣)이었음을 숨기기 위해 만주와 한반도로 옮겨 왜곡하나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사와 일본사도 거의가 3류 소설과 같은 수준의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오늘 거론할 한사군(漢四郡)이나 살수(薩水), 패수(浿水)도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있었음을 이미 밝혔다. 또한 우리는 한사군(漢四郡)이라 하나 한서(漢書,()27’에서는 개삼군(開三郡)이라 하였다. 그리고 진번군(眞番郡)은 양자강 이남에도 있다. 그런데 후한서(後漢書) 85에 조선분치(朝鮮分置), 낙랑(樂浪), 임둔(臨屯), 현토(玄菟), 진번(眞番) 사군(四郡)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서(漢書7), 사기(史記30)과 삼국지(三國志30) 뿐 아니라 역사를 전공한 사람과 재야학자 가운데도 연구를 하지 않은 사람들은 마치 살수(薩水)와 패수(浿水)가 반도(半島) 안에 있는 양 말하는 것을 보면 너무 실망스럽다. 당시 살수(薩水)와 패수(浿水)라는 강()은 한반도에는 없고 대륙에 있는 강이다. (以上吳在成,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97~101, 吳在成,‘百濟中國에 있었다’. 113~240參照하고,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고 말해야 할 것은, 한반도에는 요수(遼水)가 없다. 요수(遼水)가 없으면 한반도(韓半島)에 요동(遼東), 요서(遼西)가 존재할 수 없다. 이 요수(遼水)를 경계로 동쪽이 요동(遼東)이고 서쪽이 요서(遼西)이다. 요동(遼東) 요서(遼西)땅에 한사군(漢四郡)이 있다는데 요동(遼東), 요서(遼西)가 없으면 한반도(韓半島)에 한사군(漢四郡)이 존재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韓半島)에 한사군(漢四郡)의 낙랑군(樂浪郡)이 없으면 평양(平壤)과 패수(浿水)가 존재할 수 없다. 역사 왜곡과 변조(變造)도 분수가 있지 참으로 웃음을 참기 어려울 정도다.
 
한반도 북부와 하북성 지역에는 남북 방향으로 된 요수(遼水)라는 큰 강은 없다. 이 강이 없는데 요동, 요서와 한사군이 있을 수 없다. 요동(遼東) 요서(遼西), 한사군이 없으니 역사 이래 한사군이 우리 영역에 존재할 수 없는 조작인 것이다. 이 조작을 구분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런데 요(), 요수(遼水)라는 곳은 여기저기 널려 있다. 예컨대 태행산맥과 진류가 경계인 요 또는 산서성의 청장수가 요수(遼水)이고, 산동성의 동황하(東黃河)가 요수(遼水)이며, 산서성의 영정하(永定河)가 요수(遼水)이고 산서성 대동에서 북경 동쪽 천진으로 흐르는 강이 요수이다.
옛날 하북성 하단에서 천진으로 흐르는 강(小遼)도 산서성 영구지역에서 하북성 정주를 지나 천진으로 흐르는 강도 전국시대 요수(遼水)로 불러지고 현재의 요하(遼河)도 요수(遼水)이다. 이같이 요수(遼水)도 많으니 지명(地名)의 이동(移動), 조작(造作)도 제멋대로 인 것이다.(以上은 유우찬, 한국사검토서3. ‘한국사의 실체’ 126~152) ; ‘한국사의 쟁점’ 41~66面 參照, 引用).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東夷歷史 ’. (右犂)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九犂系, 新羅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日本史’. 吳在成 編著, ‘지도로 보는 우리나라역사(東夷疆域圖)’.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김동락, ‘천부경과 문디거시기’. 황순종,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이강민,‘대한국고대사’.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李進熙’ ‘好太王碑’.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歷史’. 石井進外3,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延長-, ‘古代日本史’. 秋山謙藏, ‘日本歷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べる日本史’. 杉山徹宗, ‘眞實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歷史. , . 李民樹,'朝鮮傳‘.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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