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書紀]는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사서인가!

입력 2019-02-16 10: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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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을형 숭전대 전 법대교수
일본사서(史書)712년 고사기(古事記)가 텐무(天武673~686)왕의 명()을 받아 히에다노 아례(稗田阿礼)가 송습(誦習)한 전승(傳承)을 오오노 야스마로(太安萬呂)가 찬록(撰錄)한 신대(神代)로부터~스이코(推古593~628)까지 설화가 기술된 3권이 시작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신대(神代)~지토우(持統687~697)까지 내용으로 한 전30(30)으로 되어 있으나 5세기이전의 기술(記述)은 사실과 작위(作爲)가 섞여있어 사실부분의 고증(考證)은 하지도 않으면서 어렵다고 하여 대륙에서의 역사를 숨기고 있다.
 
또한 속일본기(續日本記)-환무(桓武)~(淳和)791~833), 속일본후기(續日本後記)-인명(仁明833~850),문덕실록(文德實錄),삼대실록(三代實錄),청화(淸和)~광효(光孝858~887)이 나와 있으나 이 서책들도 사서라기보다는 왜곡된 신뢰할 수 없는 위서(僞書)들이다.
 
일본의 역사서책들을 살펴보면 야마토조정(大和朝廷)남조선에 출병해서 임나(任那)라고 부르는 제국을 그 세력 하에 두고 백제, 신라를 압박하여 고구려와 격렬한 싸움을 하였다든가, 있지도 않고 가능할 수도 없는 왜()역사를 제멋대로 기술하고 있다.
 
고사기(古事記)5~6세기경의 제기(帝紀)의 구사(舊辭)가 개작(改作)되어 편찬(編纂)돼서 오오노 야스마로(太安萬呂)에 의해 완성을 보고 있는데 그 문체나 한자(漢字)의 음훈(音訓)을 혼용해서 고어(古語) 그대로 쓰여 있어서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伽倻;加羅)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당시공용어는 조선어였다.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는 당시 정치권력을 잡은 측에 좋도록 만들어진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조선을 부인함으로서 일본왕통의 뿌리를 부인하기 위해 조선을 애써 무시하려는 그릇된 역사관은 전전(戰前) 교육관에 반영됐다. 그 체제를 유지할 대의명분(大義名分)과 권위(權威)를 과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관(史觀)은 끝내는 대한침략사관(大韓侵略史觀)으로 변질되어 오늘날에도 한일문제(韓日問題)의 큰 장애(障碍)로 남아 있다. 오늘날 21세기가 되었어도 일본의 아베신조(安倍晋三)정부는 구태의연(舊態依然)19세기정책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오늘은 일본이 다른 민족이 아니라 우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과 왜구가 다름 아닌 왜()와 백제의 부흥군인 연합해군이었고 왜가 대륙에 있었음을 분명히 밝히려 한다.
 
일식관측지도 왜()는 양자강 남쪽이었다.
 
일본의 역사서로 내세우는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처음부터 마치 일본열도에서 건국하고 있었던 것같이 꾸며 말하고 있으나 홍수(洪水)와 천체(天體)의 사실을 추적해보면 일본열도가 아니다. 천문학을 전공한 박창범 교수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일식(日蝕)들을 시뮬레이션 한 결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삼국시대의 고구려는 바이칼 호수, 백제는 북경일대, 사로신라는 양자강 하류, 서라벌신라는 한반도 남부로 관측됐다는 것이고, ()는 타이완(臺灣)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왜()는 일본열도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는 것이다.
 
일본은 대륙의 역사를 숨기고 있는데 이 당시 삼국사(三國史) ()46이나 중국남제서(中國南齊書) ()58에서 보듯 고구려, 백제가 북으로 유(), (), (), (), 남으로 오월(吳越)지역에 있었던 사로신라(斯盧新羅)와 가야(伽倻)가 그곳에 있었던 대륙양자강 이남의 왜()이지 일본열도(日本列島)가 아님은 중국사서에서 다 밝혀졌다.
 
지금은 과학의 발달로 이런 사실이 거짓 없이 다 밝혀지는 세상이다. 제아무리 역사를 억지로 숨기며 왜곡하나 숨길 수 없는 것이다. , 670년 이전의 관측(觀測)은 대륙에서 관측되고 타이완(臺灣)에 온 후의 일본은 타이완(臺灣)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일식집중관측지가 양자강 이남이라면 일본의 위치는 어디인가. 이 위치를 밝혀줄 기록은 백제, 신라, 가라(加羅)와 같은 지역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를 바꿀 수 없고 중국25(中國25史東夷)위치에서 벗어 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일본의 위치는 유(),(),(),(),오월(吳越)의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곳은 대륙의 동해안을 끼고 있는 산동반도(山東半島)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뻗어있는 살기 좋은 기름진 광활한 대륙을 가리킨다.
 
이때의 일본서기의 기록들도 4명의 왕 때 7번 나와 있다. , 스이코(推古) 36(628410), 죠메이(舒明) 8(6361) 일식, 9(63741) 일식, 텐무(天武) 9(6801127) 일식, 10(6811116) 일식, 지토우(持統) 5(693105) 일식, 8(6943, 9) 일식, 10(6967) 일식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스이코(推古), 죠메이(舒明), 텐무(天武), 지토우(持統) 4명 천황(天皇)의 시대의 일본(日本)은 타이완인 대만(臺灣)의 일본(日本)이지, 일본열도(日本列島)가 아니었다.
 
일본사(日本史)를 보면 매우 그럴듯하게 잘 짜여 지고 믿을 수 있게 왜곡(歪曲)되어 있어 일본사(日本史)가 진실인 양 느끼게 되어 하자(瑕疵)가 없는 것같이 보이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허구(虛構)인 것을 제대로 연구한 자라면 다 알 수 있다.
 
지진, 홍수 일본서기기록도 대륙시대 것이었다.
 
이미 장마와 홍수 등 자연현상에 대하여는 이미 밝혔기에 여기서는 일본서기에 나타난 지진(地震)을 살펴봐도 지진의 발상지가 대륙이지 일본열도의 지진이 아니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13번의 지진이 나오는데 양자강 이남 시대의 지진은 일본이 한제이덴노(反正天皇406~410) 5년인 41117월을 시작으로 스이코덴노(推古天皇) 741일의 지동, 코우교쿠덴노(皇極天皇642~645) 1, 108~9일 지진을 볼 수 있다.
 
또 텐무덴노(天武天皇673~679)때에는 9번이 기록되어 있다. 텐무(天武)4(675) 11월의 지진, 텐무(天武) 8(679) 1114일의 지진, 텐무(天武) 10(681) 1018일의 지진, 텐무(天武)11(682) 119일의 지진. 37일의 지진, 717일의 지진, 812, 17일의 지진, 13(684) 1014일 지진에는 산이 무너지고 냇물이 넘쳤고, 141210, 19일 지진과 지토우 덴노(持統天皇) 1(687) 1117일 기록이 있다.
 
이 기록도 그 연대를 보면 대륙과 대만(臺灣)에서의 지진이었지 일본열도가 아니었다.
 
한편 대륙에서의 큰비와 홍수기록도 일본열도라는 일본서기의 허구도 가관(可觀)이다.
우리나라나 일본열도는 장마가 6월에서 7월말경인데 반하여 대륙에서는 3월부터 장마가 시작하여 늦게는 9월까지 장마가 졌다고 기록한 것도 볼 수 있다.
 
닌토쿠덴노(仁德天皇313~399) 4(316) 3월에 풍우(風雨)가 오고, 닌토쿠덴노(仁德天皇) 11(323)4월 장마가 왔으며 회오리바람인 표풍(飄風)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부레츠(武烈天皇499~5063) 8년에는 3월에 대풍(大風)과 폭우가 왔고, 킨메이덴노(欽明天皇507~571) 28년에는 전국에 홍수가 났으며, 비다츠(敏達天皇571~584) 14(58431)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스이코덴노(推古天皇) 9년째인 6015월에 큰비가 오고 강물이 넘치고 6253월부터 7월까지 장마가 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코우교쿠덴노(皇極天皇642~645) 3월에는 구름 없이 비가 오고 4월에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왔으며 8월에는 큰 비가 오고 우박이 왔다고 했는가 하면, 코우토쿠(孝德天皇645~654) 49일째 비가 와서 집이 무너지고 논의 모가 상했다고 했다. 텐지덴노(天智天皇662~672) 4월 큰 비가 오고 번개가 쳤다는 이곳은 일본열도가 아니고 대륙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일식관측(日蝕觀測)과 지진(地震), 홍수(洪水)등 모든 자연현상과 중국의 모든 사서(史書)들도 일본(日本)은 왜()때부터 670, 대만(臺灣)에서의 일본(日本) 국호를 쓴 시대는 대륙과 대만이지 일본열도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以上吳在成, ‘九犂系, -日本史’. 58~61參照,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왜구(倭寇)는 왜와 백제의 연합군대로 본다.
 
우리는 누구나 왜구(倭寇)하면, 일본열도에서 온 해적(海賊)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이 왜구(倭寇)는 당시 대륙상황을 보면 해적집단(海賊集團)이 아니고 수백 척의 바다의 연합군대로 백제가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멸망할 때와 663년의 백제부흥군(百濟復興軍)을 도운 백강전투에서 패한 왜()와 백제(百濟)의 연합군으로 봐야한다.
 
14세기 말엽 부터 16세기에 걸쳐 원(), ()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의 해안을 침범했는데, 100척에서 500척의 대규모로 침범하였다. 해적이 이 정도 규모의 선단(船團)을 꾸미고 이동하는 집단이니 이들은 해적이 아니라 군대이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나라를 잃은 백제인(百濟人)과 오진(應神)이 나라를 세워 왜()라고 한 왜국(倭國)이었던 왜()670년 국호를 왜국(倭國)에서 일본(日本)으로 바꾼 타이완(臺灣);일본(日本)1279년 원()나라 침입으로 그 땅마저 잃음으로 13~14세기에 백제유민과 왜인(倭人)이 연합한 군대가 왜구(倭寇)라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로신라(斯盧新羅)와 당()에 의해서 대륙에서 축출(逐出)되어 왜이주(倭夷洲)였던 타이완(臺灣)에 백제유민(百濟流民)이 가서 왜()와 같이 나라를 세우고 새 정부(政府)를 갖춘 후 본토회복(本土回復)을 목표로 한 부흥군(復興軍)으로 보고 있다.
 
그 후 사로신라(斯盧新羅)의 장보고군(張保皐軍) 때문에 잠시 본토 회복의 꿈을 접어 두었는데 1279년 원()의 침입은 왜이주(倭夷洲);타이완(臺灣)마저 잃은 결과에서다.
 
이렇게 되자 옛 고토(故土)를 회복하려고 군대를 일으켜 대륙의 동해안(東海岸)으로 침범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조선(朝鮮)을 침범, 1350~1391년의 40년간 591회나 침범한다. 이도 성공하지 못하자 일본열도(日本列島)를 개척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타이완에 있던 일본이 일본열도로 가게 된 것은 원()1279년 침범으로 왜()가 대륙에서 타이완으로 쫓겨나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고치고 본토회복을 준비해 왔다.
 
()의 공격을 받아 많은 일본 유민들이 대륙으로 진출한 것을 왜구침입으로 보고 있는데 당시 선단이100~500척에 달하는 대규모로 침범한 것은 이를 말해 준다.
 
이는 해적집단이 아니라 왜()와 백제, 가야(伽倻)의 유민들이 당()과 원으로부터 본토회복을 위한 전쟁의 한 방편이었다. 본토회복이 되지 않자 명, 고려, 조선을 침범하였다. 이곳에서도 정착이 아니 됨으로 일본열도로 신 개척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1350년대부터 1400년대까지 극성을 부렸으나 끝내 본토회복(本土回復)도 못하게 됨으로서 신개척지 일본열도(日本列島)에 가서 신일본(新日本)을 건설하게 됐다.
(以上吳在成, ‘九犂系, -日本史’. 49~50參照,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나라를 잃은 대륙(大陸)의 우리 동이족으로 우리와 피를 나눈 자들이다 이들이 일본열도로 가서 일본을 평정(平定)한 것은 1281년으로 보고 있다.
처음에는 가야인(伽倻人)이 먼저 가고 뒤이어 낙랑국(樂浪國)의 유민과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의 유민(流民)들이 가게 된 것이다. 이들은 수없는 전투(戰鬪)가 있었기 때문에 싸움에도 능했다. 이들이 일본열도(日本列島)로 가서 정착하게 된 것이다.
 
글을 맺으며 일본의 첫 왕은 진무(神武)가 아니라 가야계(伽倻系) 오진(應神)임을 밝힌다. 이 오진(應神363~394)이 왜()첫 왕으로 뚜렷한 실존인물인 왜왕 1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왕계(王系)의 연대도 제멋대로라서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한편 일본의 시조(始祖)는 서기전 660년이 아니라 부여(夫餘) 기마족(騎馬族)인 오진(應神)369년 나라를 세워 왜()라하고, 이후 두 번째로 국호를 왜()에서 670년 국호(國號)를 일본(日本)으로 바꾼 것이 타이완;대만(臺灣)이었음을 숨길 수 없다.
 
한편, 일본역사를 심층적으로 연구해온 최태영 선생과 미국의 존카터 코벨 박사는 이 오진(應神)390년 태어났다고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
(以上은 카터 코벨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89面以下, 參照, 引用).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東夷歷史 ’. (右犂)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九犂系, 新羅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日本史’. 吳在成 編著, ‘지도로 보는 우리나라역사(東夷疆域圖)’.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김동락, ‘천부경과 문디거시기’. 황순종,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이강민,‘대한국고대사’.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李進熙’ ‘好太王碑’.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歷史’. 石井進外3,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延長-, ‘古代日本史’. 秋山謙藏, ‘日本歷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べる日本史’. 杉山徹宗, ‘眞實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歷史. , . 李民樹,'朝鮮傳‘.외 다수(多數)의 서책(書冊)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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