㉓일본의 날조된 역사를 본다-예맥조선의 중국 1천년 지배

입력 2013-02-02 14:4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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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일제 조선사편수회가 중국사의 위조를 그대로 번역하고 도리어 허구의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바탕으로 한국사를 편찬했다. 중국사를 검토·고찰해 보면 기자나 위만이 한민족을 지배치 못한 사실이 판명된다. 여기서 위만의 행적에 대해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 사기(史記)에 따르면 이렇다. 그 당시 상황(史記 券之93.列傳33)을 보면 “한고조와 노관(盧綰)이 동향인이다. 노관의 부(父)와 한고조(漢高祖)의 부(父)가 서로 사랑하고 한고조(漢高祖)와 노관이 생일이 같다. 이로 인해 한고조(漢高祖)가 천하를 얻은 후에 노관을 연나라 왕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노관이 배반함으로 한고조(漢高祖)가 토벌했다”고 쓰여 있다. 전한서 조선전(前漢書 朝鮮傳)에 “연왕(燕王) 노관이 반인흉노(反入匈奴) 연인(燕人) 위만(衛滿) 망명”이라 했다. 즉, 노관이 한고조를 배반하다가 실패하고 흉노에 도피하니 노관과 같이 한고조를 배반하던 위만(노관의 부하)이 조선에 망명했다고 기록 돼 있는 것이다. 또 사기(史記)에 따르면 노관이 덕망과 선치(善治)가 없고 일시적 권모로서 성공했다고 돼 있다. 위만은 한고조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밖으로 예맥(銳麥)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키다가 실패하고 흉노에 도피했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예맥(銳麥)은 조선을 지칭(指稱)한다.
 
미약한 이민족(異民族) 위만(衛萬)의 정체
 
이는 노관의 부하 위만이 일개의 사기꾼으로 안에서는 한고조(漢高祖)의 불신을 받고 오직 예맥(銳麥)을 배경으로 반란을 시도하다가 패망한 것을 말하는 있다. 또 한고조 4년에 예맥이 용감한 한 기병을 보내 한을 도와주었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고조가 예맥의 원조를 받았다고 돼 있다. 노관과 위만이 예맥(銳麥)을 등에 업고 한고조를 배반하고 한고조가 예맥(銳麥)의 군사적 원조를 받은 것은 예맥(銳麥)의 국력이 한고조의 국력보다 강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맥(銳麥)의 국력이 한고조보다 미약했다면 노관과 위만이 예맥을 등에 업고 한고조를 배반 할 수 없고 예맥(銳麥)의 국력이 한고조의 국력보다 빈약하다면 군사적으로 한고조를 후원 할 수 없다. 그런데 한고조에게 경멸당하고 빈손으로 조선에 망명해 유명무실한 기자조선을 계승한 위만이 한민족(漢民族)보다 강대한 예맥(銳麥=조선)을 정복하고 우리 민족을 지배했다는 것은 분명한 허위 조작이요 역사왜곡이다.
 
위만(衛滿)은 조선에 망명 할 때에 한민족(韓民族)의 의복을 입고 한민족의 상투를 틀었다. 이는 한민족인 예맥(銳麥)을 배경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위만(衛滿)이 한민족(韓民族)의 보호를 받기 위해 한민족(韓民族)을 가장 한 것이다. 한민족의 보호에 의해 겨우 생명을 보존한 망명객 위만이 세운 정권은 한 지방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존재일 뿐 강대한 예맥(銳麥)을 정복하고 우리민족을 지배 할 수 없었다. 허위·조작으로 정평(定評)이 나 있는 중국역사를 문면(文面) 그대로 믿을 수 없는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다. 우리나라 대부분 학자들은 위만조선도 있었던 것 같이 말하고 있으나 복초 최인(伏草 崔仁) 선생은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실재하지 않았다고 훌륭한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필자도 최인선생의 연구가 옳다고 보고 있다. 중국역사를 고찰 하면 위만이 한민족을 지배치 못한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일제가 왜곡·조작한 역사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학노(學奴)들은 아직도 연구는 않고 중국과 일본이 조작·왜곡한 역사만을 가르치고 있다. 민족의 배반자나 진배없다.
 
분명한 것은 한고조를 도와 준 강대한 예맥(銳麥)은 위만(衛滿)을 책동해 한고조(漢高祖)를 배반케 한 강대한 국가였다. 위만이 의존해 생명의 보호를 받을 만큼 강대한 예맥(銳麥)이었다. 이런 예맥(銳麥)의 원조를 받은 한고조(漢高祖)에게 쫓겨난 미약한 이민족인 위만, 예맥(銳麥)의 지원 하에 반란을 일으킨 미약한 위만(衛滿), 예맥(銳麥)의 보호 하에 겨우 생명을 보존한 위만(衛滿) 등은 역사적 진실이다. 당시 예맥의 치밀한 국제정치도 돋보이는 대목이다. 중국과 일본이 이 같은 위만(衛滿)을 앞세워 이를 기점(起點)으로 우리 한국사(韓國史)를 엮어 놓은 것은 역사의 도둑 내지 나아가 사기꾼과 다르지 않다. 아울러 한사군(漢四郡)에 관한 것도 날조(捏造)이며 조작(造作)이다. 이러한 기만(欺瞞)과 허위조작(虛僞造作)으로 왜곡(歪曲)된 역사를 그대로 가르친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식도 없는 자나 할 매국행위다. 사대주의(事大主義) 식민사관(植民史觀)을 탈피지 못한 구태(舊態)에서 못 벗어나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과 한사군은 우리의 강대한 예맥조선(銳麥朝鮮)의 적수 자체가 되지 못했다.
 
한사군의 실체와 중국의 역사왜곡
 
일제의 ‘조선사편수회’는 다시 한사군(漢四郡)에 대해서도 중국역사를 그대로 옮겼다. 한무제(漢武帝)가 우리민족을 정복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했다는 중국사(中國史)의 위조(僞造)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한무제(漢武帝)가 우리민족을 지배한 적도 없거니와 한무제(漢武帝)가 우리민족을 정복한 일도 없다. 이 같은 사실은 중국역사에도 명기(明記)돼 있다. 삼국지(三國志)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정복해 사군(四郡)을 설치하니 한민족(韓民族)과 한민족(漢民族)이 분리됐다”고 했다. 다시 말해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중국민족과 분리 돼 중국민족은 사군(四郡)에 예속됐다. 이들은 한무제(漢武帝)의 지배를 받고, 위만조선에 거류(居留)하던 한민족(韓民族)은 한무제(漢武帝)의 지배를 받는 중국민족과 분리돼 지배를 받지 않은 것이라고 삼국지(三國志)는 적고 있다. 이는 중국역사 스스로 한무제(漢武帝)가 우리민족을 정복하고 지배치 못한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사군(漢四郡)은 한반도가 아니고 요동에 있었다.
 
이상의 고찰(考察)에서 본 바와 같이 기자(箕子)가 우리민족을 지배 한 적이 없고 위만(衛滿)이 우리민족의 지배자가 되지 못했다. 한무제(漢武帝) 역시 우리민족을 정복하지 못한 것이 판명되고 있다. 그럼에도 어찌해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나 위만조선(衛滿朝鮮)이 우리 교과서에까지 다시 실고 있는 것인가. 이는 아직도 일제 ‘조선사편수회’의 왜곡된 역사만을 신봉하는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탈피치 못한 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 역사는 골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기자조선(箕子朝鮮)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순수한 한인(漢人)의 집단이다. 우리민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삼국지(三國志) 제30 동이전(東夷傳)에 “위만(衛滿)이 기자(箕子)의 40여대손인 회(淮)를 계승해 조선왕이 되었다”고 했다. 순수한 한인(漢人)의 집단인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계승한 위만조선(衛滿朝鮮)도 한인(漢人)의 집단이요 한인(漢人)의 집단인 위만조선을 정복하고 설치한 한무제(漢武帝)의 사군(四郡)도 한인(漢人)의 집단이며 우리민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조선은 한족(漢族)을 제압하고 천하를 호령했다
 
기자조선(箕子朝鮮), 위만조선(衛滿朝鮮), 한사군(漢四郡) 당시에 천하를 호령하던 강대한 예맥(銳麥=조선)이 엄연히 존재했다. 이를 전제하면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등 한인(漢人)의 집단이 우리민족의 영토를 감히 엿볼 생각도 못했다. 예맥(銳麥)은 그만큼 강국이었다. 오히려 우리민족은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을 제압한 민족이었다. 우리 선조들은 이들 위에서 군림 할 만큼 중국 이외의 민족적 주체가 됐다. 반면 “기자가 스스로 조선에 망명하였다”거나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주장 등은 기자가 동래(東來)하기 전에 이미 조선이라는 부족국가가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조선은 어떤 조선인가? 광의적(廣義的)으로 단군조선(檀君朝鮮)이요 협의적(狹義的)으로 예맥조선(銳麥朝鮮)이다. 제왕운기(帝王韻紀)에 고시라(故尸羅), 고예(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夫餘), 예맥(銳麥)이 단군(檀君)의 수(壽)라고 했다. 이는 모든 부족의 족장을 단군(檀君)이라 칭한다고 한 것이다. 이 모든 족장(族長) 중 주체는 예맥조선(銳麥朝鮮)이었다. 서전 무성편(書傳 武成篇)에 화하(華夏) 만맥(蠻貊)이라 했다.
 
이것은 안으로 중국과 밖으로 예맥(銳麥)이라 기록한 것이다. 이는 예맥조선(銳麥朝鮮)이 매우 강대해 중국 이외의 모든 민족을 대표했다고 표시한 것이다. 무성편(武成篇))은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을 정벌한 역사를 기록 한 것이다.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을 정복한 후에 기자(箕子)가 동래했다. 그러면 예맥조선(銳麥朝鮮)은 기자조선보다 먼저 건설되고 지극히 강대해 중국과 대립병칭(對立竝稱)된 것이다. 그렇기에 기자가 동래할 당시 예맥조선(銳麥朝鮮)은 매우 강대해 위만(衛滿)의 상전(上典)인 한고조(漢高祖)를 예맥조선(銳麥朝鮮)이 위만(衛滿)을 책동(策動)하여 한고조를 배반케 한 것이었다. 또한 한고조가 사군을 설치한 후 26년 만에 예맥조선(銳麥朝鮮)이 진번(眞番)과 임둔(臨屯) 이군(二郡)을 탈취하고 현토군(玄菟郡)도 대부분 빼앗았다. 이뿐만 아니라 예맥조선(銳麥朝鮮)은 동주시대(東周時代)부터 한무제시대(漢武帝時代)까지 중국에 남쪽으로 출병해 한족(漢族)을 정벌 또는 정복했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은 40여대 계승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기간 동안 많은 군주(君主)의 이름이 역사에 나와야 한다. 군주(君主)의 이름이 어느 역사 기록에도 한사람도 없다. 그리고 기자조선(箕子朝鮮)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전혀 없다. 이는 한 개의 망명정권으로서 유명무실한 존재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위만조선(衛滿朝鮮)도 역사적 기록이 없다. 이는 한 지방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한 미약한 존재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사군(漢四郡)도 3군을 예맥조선(銳麥朝鮮)에 빼앗긴 것을 보면 역시 미약한 존재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은 당시 예맥조선(銳麥朝鮮)에 예속돼 있는 상태였다. 예맥조선(銳麥朝鮮)은 동주시대(東周時代)부터 한무제시대(漢武帝時代)까지 1천여 년 동안 중국을 정벌, 정복, 지배한 사실이 중국사에 명기돼 있다. 이 사실을 중국의 고대사 고증을 통해 중국통일 전의 사실을 잠시 추적하고 가려고 한다. 이상은 복초 최인(伏草 崔仁) 선생의 ‘한국학 강의’(韓國學講義)>등을 참고했다. 선생에게 경의를 표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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