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서 대중화(大中華)라는 제국주의(帝國主義)에 편향(偏向)하여 중국(中國)을 중심(中心)으로 한 역사위조(歷史僞造)는 고대부터 행하여 온 것을 중국학자(中國學者)인 양계초(梁啓超), 사부아(謝扶雅)등도 이를 긍정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을 중심으로 한 중국역사에 주무왕(周武王)이 은(殷)을 멸한 후에 기자를 조선왕으로 임명하고 기자가 주무왕(周武王)의 임명을 받아 조선왕이 되어 한민족을 지배하고 연인(燕人) 위만이 기자조선을 계승하여 한민족의 지배자가 되고 한무제(漢武帝)가 또한 위만조선(衛滿朝鮮)을 정복하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여 완전히 우리민족을 지배하였다고 기록했다.
기자조선은 모두 허구(虛構)인데도 조작 역사에 익숙한 우리사학계는 기자조선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갈팡질팡하며 모순된 주장을 하고들 있다. 기자조선을 부정하는 1설(說)로서 한씨조선설(韓氏朝鮮說)까지 등장시켜 중고교과서에 까지 등재하는 우리 사학계는 한심하다.
한씨조선설(韓氏朝鮮說)은 기자조선을 부정하는 일설(一說)로서 내세우고 있는 설(說)인데, 이 는 본래 송(宋)나라 왕응린(王應麟)과 청(淸)나라 고염무(顧炎武), 그리고 청나라 가경시대(嘉慶時代) 왕계배(汪繼培)등이 시전한혁장(詩傳韓奕章)의 한씨(韓氏)를 근거로 위조한 것이다.
왕계배(汪繼培)는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옛날 주선왕(周宣王)때에......한서(韓西)가 한씨(韓氏)로 성(姓)을 하였다가 위만(衛滿)에게 망하였다’는 문구(文句)를 들어서 한씨조선(朝鮮)을 억설(臆說)하였던 것이다. 와씨(汪氏)는, 한(韓)은, 조(朝)의 오자(誤字)요. 서(西)는, 선(鮮)과 동일하다 하여 한서(韓西)는 조선이라 억지설을 폈던 것이다.
그런데 기자(箕子)가 한씨(韓氏)가 아니라는 실증(實證)이 있다. ‘위략집본(魏略輯本)’에 기자(箕子)의 후손인 기준(箕準)이 ‘...인(因)하여 한씨(韓氏)로 모성(冒姓)을
하였다’ 고하였다. 모성(冒姓)은 가성(假姓)을 말하는 것이다. 즉, 위만(衛滿)이 기자조선을 탈취하고 기자(箕子)의 후손(後孫)을 압박함으로 본성(本姓)을 감추고 한씨(韓氏)라는 가성(假姓)을 사용한 것이다. 여기서 가성(假姓)이 한씨(韓氏)라는 것은 본성(本姓)이 한씨(韓氏)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중국사가(中國史家)가 무리한 한씨조선설(韓氏朝鮮說)을 주장하는 것은, 우리민족을 중국인의 후손으로 조작하려는 의도(意圖)에서이다. ‘시전한혁장(詩傳韓奕章)’ 주(註)에 [孔氏曰韓武之穆也]라 하였다. 즉 ‘한씨(韓氏)는 주무왕(周武王)이요 후손(後孫)이라 한 것’이다. 그리고 한(韓)은 국명(國名)이요 후작(侯爵)이요 무왕의 후손(後孫)이라 하였다.
우리민족을 주무왕(周武王)의 후손(後孫)으로 조작하기위하여 한씨조선설(韓氏朝鮮說)을 위조한 것이다. 중국사가의 무리한 조작을 그대로 번역하는 것은 우리민족을 말살하는 대오류(大誤謬)이다. 오늘은 이 허구의 역사조작의 원류(原流)인 [기자조선]에 관하여 살펴보고 져 한다.
기자조선의 원문에 나타난 전말(顚末)
중국사가(中國史家) ‘주무왕(周武王)이 은(殷)을 멸한 후에 기자를 조선왕으로 임명하고 기자가 주무왕(周武王)의 임명을 받아 조선왕이 되어 한민족(韓民族)을 지배하였다’고 위조한 것은 바로 검토하면 그 허위(虛僞)조작이 판명(判明)된다.
그것은 중국역사서인 한서(漢書)에 [箕子 去之朝鮮(師高曰 史記云 武王伐紂 封箕子於朝鮮 如此不同)이라 하였다. 즉 기자(箕子)가 스스로 조선에 망명한 것이고, 주무왕(周武王)의 임명을 받아 한민족(韓民族)을 지배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주무왕(周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왕으로 임명하였다는 주장은 상서(尙書) 홍범장(洪範章) 주(註)에 [周武封箕子 干朝鮮]이라는 문구에 근거한 것이다.
봉(封)은 임명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원문을 검토해보면 봉자(封字)는 분명한 위조임이 밝혀진다. 원문(原文)은 [箕子嘗言 淪喪我罔爲臣僕 史記亦載 箕子 陳洪範之後 武王 封箕子干 朝鮮 而不臣也 蓋箕子 不可臣 武王 亦遂其志 而不臣也]라 하였다. 즉 기자가 일찍이 ‘나는 은(殷)이 망한 후에 주무왕(周武王)의 임명을 받는 신복(臣僕)이 되지 아니하겠다.’고 말하였다.
또한 사기(史記)에도 기자(箕子)가 천도(天道)인 홍범(洪範)을 설교한 후에 주무왕(周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고 임명하는 신복으로 대우하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봉자(封字)는 분명한 위조인 것이다. 이를 중국사가(中國史家)와 우리나라 사대사가(事大史家)들이 기자조선(箕子朝鮮)을 허위 선전하여 기자(箕子)가 우리민족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한 것이다.
중국인들은 일방적으로 자기들이 인류(人類)의 종주국(宗主國)이라 자처하며 타민족(他民族)을 신복(臣僕)으로 간주(看做)하는 전통(傳統)이 있다. 우리나라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동명왕(東明王)이 단군(檀君)의 아들이라 하였다. 이는 단군조선을 계승한 자가 기자(箕子)가 아니고 동명왕(東明王)이라 한 것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역사를 위조하는 중국역사에 ‘기자(箕子)가 한민족(韓民族)을 지배한 일이 없다’고 기록한 것은 분명한 진실(眞實)인 것이다. 그런데 중국사가(中國史家)와 우리나라사대사가(事大史家)들이 고대로부터 우리가 중국에 예속되었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인 것이다.
[해동역사(海東繹史)]에 기자([箕子)가 중국인 5천명을 거느리고 동래(東來)하였다고 하였다. 그 당시는 인구가 적고 토지가 많음으로 동일한 부족도 딴 지방에 진출하여 부족집단(部族集團)을 창설하고 딴 부족을 형성(形成)함으로 많은 부족이 병립(竝立)하였던 시대이다.
이 때 기자가 5000명을 데리고 공한지(空閑地)에 중국인의 집단인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건설하고 그 지배자(支配者)가 되었는데 이렇게 된 것은 당시 주무왕(周武王)이 은(殷)을 정복한 후에 은(殷)의 충신이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개함으로 그 운동자를 학대하면서 강제로 주(周)의 서울로 포인(捕因)한 것이 원인으로 보고 있다.
‘서전필명편(書傳畢命篇)’에 (毖殷頑民 遷殷洛邑)이라하였다. 즉 은(殷)의 완민(頑民)을 뽑아서 주(周)의 서울인 낙읍(洛邑)에 이주(移住)시켰다고 했다. 은(殷)의 충신(忠臣)이며 사상가(思想家)인 기자(箕子)가 강대한 외국으로 탈출하여 그 국가를 배경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여기서 기자가 주무왕(周武王)의 임명을 받아들여 동래(東來)하여 한민족을 지배하였다는 것은 이를 검토해 보면 이는 허위조작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있지도 않은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거듭 논하며 역사왜곡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는 것임에서 이제는 이 왜곡역사는 이를 끝내야 한다. (以上은 崔仁, ‘韓國學講義’, 65~69면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곡역사만을 배우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오히려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많음에서 역사를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기자조선의 정체를 분명하게 해야 함을 통감하며 이 실체가 없는 기자조선은 이제 끝을 내어야 한다.
사서의 기록에 보는 기자조선=번조선(番朝鮮)
기자의 신상(身上)에 관하여 살펴보면, 기자의 이름은 서여(西余)이고, 기(箕)는 지명(地名)이고 자(子)는 작호(爵號)이다. 즉 기자는 직책명칭이지만 왕은 아니다. 기자의 후예로 기후(箕詡) 때 번조선왕(番朝鮮王)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기씨(箕氏)의 나라인 번조선(番朝鮮)이었다.
단군조선과 구별하기 위하여 번조선(番朝鮮)으로 명명(命名)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동국통감(東國通鑑)]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사찬요(東史簒要), 동국사략(東國史略), 동국보유(東國補遺)]은 기자조선으로 하였다. 따라서 조선을 여러 번 반복한 명칭임으로 구별하기 위하여 번조선(番朝鮮)으로 하였다. 이 번조선(番朝鮮)을 사기(史記)에서는 진번조선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위만조선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위만이 조선을 찬탈한 조선이 바로 기준(箕準)의 조선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위만조선의 임금은 연(燕)나라사람으로 연(燕)이 전성할 때부터 일찍이 진번조선(眞番朝鮮)을 침략하여 연(燕)에 병합시키고 관리를 두고 진번조선이라 하였다. 이 진번조선을 줄여서 번조선(番朝鮮)으로 명명(命名)하였다.
그리고 회수(淮水) 역시 기준(箕準)의 준(準)에서 만든 것으로 삼국지에는 ‘회당작준(淮當作準)’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기준(箕準)이 다스리던 땅임으로 그 강 이름을 회수(淮水)로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분명 회수(淮水)는 기준(箕準)과 관계가 있는 명칭으로 연구대상이다. 이 지역은 번조선(番朝鮮) 패망 후 기준(箕準)이 활동하던 곳이다.
또한 기준(箕準)은 고조선 마지막 왕이 아니라 번조선(番朝鮮)의 마지막 왕이다. 번조선(番朝鮮)은 서기전 323~서기전194년)까지 존재하였고 기준(箕準)은 서기전 221~서기전194년)사이의 마지막 왕이었다. 번조선(番朝鮮)은 6명의 왕(王)이 다스렸는데 1대 기후(箕詡), 2대 기욱(箕煜), 3대 기석(箕釋) 4대 기윤(箕潤), 5대 기비(箕丕), 마지막 왕이 6대 기준(箕準)이었다.
우리역사연구원의 오재성 선생은, 기준(箕準)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즉, 위만(衛滿)에게 왕위를 빼앗긴 기준(箕準)이 남쪽 구한(舊韓)지역으로 가서 삼한을 건국하고 진왕(辰王)이 되었는데 분명히 기준(箕準)은 번조선의 왕이었고, 조선의 왕은 아니다. 고 하고 있다.
그럼에도 기준(箕準)을 마지막 왕으로 표기된 것은 번조선(番朝鮮)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왕검(王儉)의 조선, 기후(箕詡)의 조선, 위만(衛滿)의 조선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으로 오재성 선생은 왕검의 조선은 조선(朝鮮)으로, 기후(箕詡)의 조선은 번조선(番朝鮮)으로, 위만의 조선은 예(濊)조선으로 하여 기준의 마지막 왕으로 기재되는 것을 정정(訂正)하고 있다. (以上)은 오재성, ‘九犂系, 番朝鮮史’ 11면 참조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삼국지(三國志)]에 처음으로 기준(箕準)의 한(韓)을 기록하였는데 한전(韓傳)에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로서 삼한을 시작하고 번조선의 마지막으로 기록된 분이 기준(箕準)이다. 즉, 한전(韓傳)의 내용에서 시작이 기준(箕準)이고 조선의 끝이 기준(箕準)이라면 위만(衛滿)과 동시대의 인물이고 진나라 진수(陳壽)가 ‘삼국지’를 편찬하기 까지는 500여년 이전 인물이다.
진한(辰韓)의 사로신라(斯盧新羅)가 되고 서기전 39년에 변한(弁韓)이 사로신라(斯盧新羅)에 병합되고 서기 8년에 마한(馬韓)이 백제에 병합되었다. 삼한(三韓)이 망하고 중국의 위(魏), 오(吳), 촉(蜀)이 망한 후 진(晋)나라가 건국된 이후에 편찬되었는데 삼국지(三國志) 이전에 삼한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도 기록되었다는 것은 특이한 상황으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왜곡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기자조선에 왜 기준(箕準)은 셋인가
삼한을 일으킨 기준(箕準)이 번조선(番朝鮮)의 마지막 왕으로 위만(衛滿)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옛 제후국(諸侯國) 한(韓)의 땅으로 와서 나라를 세웠음에도 그 기록이 미미한 것은 한조(漢朝)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존재하는 사료(史料)로서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은 허구(虛構)의 역사로 기자가 단군조선을 이어 받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모두 허구인 것이다.
여기서 잠시 기준(箕準)에 대하여 살펴보면, 기준(箕準)은 속칭 기자조선(箕子朝鮮)을 나타내는 마지막 임금인데 어찌해서 조상(祖上)은 다르게 표현되고 있는가? 이다. 기(箕)땅의 자작(子爵)인 기자(箕子)는 그 이름이 서여(胥餘),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라 하여 세 사람으로 되어 있는데 마지막은 모두 준(準)으로 끝난다.
즉, 서여(胥餘), 서우여(徐于餘), 서여(西余)라 하여 모두 준(準)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동일인(同一人)을 다양하게 나타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기자(箕子)는 주무왕(周武王)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르칠 만큼 너무나 유명한 인물(人物)이었기에 그렇게 되어 질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기자조선은 서우여(徐于餘)~기준(箕準)까지 46대까지로 되어 있으나 이는 조작이고 왜곡한 것으로 왜곡한 왕 41대가 기후(箕詡), 46대가 기준(箕準)까지로 되어 있으나 1대 서우여(徐于餘)~40대 수한(水韓)까지는 허구(虛構)의 왕으로 실체(實體)가 존재하지 않은 왕이다. 이에 대한 실체의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이들은 1대~40대는 추존(追尊)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번조선1대 기후(箕詡), 2대 기욱(箕煜), 3대 기석(箕釋), 4대 기윤(箕潤), 5대 기비(箕丕), 마지막 왕이 6대 기준(箕準)까지 역사를 바로 하여 기자조선의 허구역사를 바로하고 가야 한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의 기자가 셋? 마지막 준(準)은 하나로 되어 있는 역사는 제아무리 미사여구(美辭麗句)로 꾸미고 조작해도 이는 실체가 없는 허구일 뿐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을 해야 할 것은 중국정사(中國正史)라 하는 중국25사에서 번조선(番朝鮮)에 관한 번조선사(番朝鮮史)가 없다. 위만(衛滿)에게 왕위를 빼앗겼다고 했으면, 당연히 기후(箕詡)~기준(箕準)까지의 조선사가 있어야 한다. 위만(衛滿)의 조선사가 있는데 기준(箕準)의 번조선사(‘番朝鮮史)’는 없다. 한전(韓傳)은 기준이 위만(衛滿)에게 조선왕위(朝鮮王位)를 찬탈 당한 후에 기록인데 이에 관한 사료가 없다.
위만의 조선 이전 번조선(番朝鮮)에 관한 사료(史料)가 없다는 것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한전(韓傳)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서 위만(衛滿) 이전의 조선사(朝鮮史)도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번조선(番朝鮮)에 관한 기록은 예전(濊傳)에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위만(衛滿)에게 빼앗기는 기준(箕準)에 관한 부분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조선사(朝鮮史)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북옥저(北沃沮)는 서기전28년에 고구려에 병합되었음에도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항목(項目)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기준(箕準)의 번조선사(番朝鮮史)가 기록되지 않은 것이 우연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위만(衛滿)이 조선왕자리를 차지하였다고 했음은 조선이 있다는 뜻인데 이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조선사를 왜곡하기 위해 감추고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以上은 오재성, ‘九犂系, 番朝鮮史’ 11면, 崔仁, ‘韓國學講義’, 65面 以下 參照 인용하였음).
(다음에 계속)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九犂系, 新羅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倭-日本史’. 吳在成 編著, ‘지도로 보는 우리나라역사(東夷疆域圖)’.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김동락, ‘천부경과 문디’ 거시기’.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石井進外3人,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上. 中, 下. 外 多數)의 書冊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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