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 자국역사 열세 만회할 목적

입력 2019-03-30 07:5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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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교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쓴 김일연(金一然)은 우리 역사를 반도사관(半島史觀)으로 한 이유가 있다. 그는 역대지리지장도(歷代地理地藏圖)3번 봤다고 했다. ()나라 때인 1100, 소동파(蘇東坡)가 만든 타이완대만(臺灣)도 없는 왜곡된 우적도(禹跡圖)’라는 지도(地圖)를 보고 동이(東夷)도 없는 것으로 하고 삼한(三韓)은 취하고 유연제노오월(幽燕齊魯吳越)을 뺐다.
 
우리 역사를 나타낸 고사서(古史書)삼국사(三國史), 지나18(支那18)동이전(東夷傳) 등이 있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부터는 옥낙역사(沃樂歷史=沃沮樂浪歷史)로 만들려 하였다. 그리고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는 한조(韓祖-韓半島後裔)로 만들었다. 이는 18세기이후에 등장한 민족개념(民族槪念)이 되었고 반도만 우리 영토로 하게 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김일연(金一然)은 우리 역사를 반도 안에 맞추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편찬하고, 그 후 신채호(申采浩)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압록강 두만강 안에만 조선족으로 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밖에는 여진족(女眞族)으로 분류(分類)해 버린다. 한편 일본은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패전(敗戰) 후 만한사관(滿韓史觀-滿洲와 한반도사관(韓半島史觀)으로 바꾸고 있다.
 
김일연(金一然)과 신채호(申采浩)는 우리의 대륙역사(大陸歷史)를 반도 안에 가두는 반도사관(半島史觀)의 역사로 매김한 그 원조(元祖)가 되었다. 이 결과 단군(檀君)도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을지문덕(乙支文德), 그 외 모든 우리 역사인물들을 우리와 관계없는 여진족(女眞族)으로 만들어버리는 모순(矛盾)을 낳게 하고 우리 영역(領域)을 반도 안으로 좁혔던 것이다. 이 역사 무지(無知)는 우리의 정체성(政體性)을 잃게 하고 있으며, 세계 사학계가 비웃고 있다.
 
우리는 역사도 삼국사(三國史)후예(後裔)를 하나로 보면, 18사 동이전삼국사를 기준으로 우리역사가 정리된다. 삼국사(三國史)후예는 아시아 전역(全域)과 유라시아를 지배한 환국(桓國), 배달국(倍達國)과 고조선(古朝鮮), 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신라(新羅가야(伽倻)와 왜()의 역사를 정리하면 되나, 옥락역사(沃樂歷史-옥저와 낙랑역사)로는 불가능하다.
 
즉 한반도는 한민족(韓民族), 만주인(滿洲人)은 여진족(女眞族)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주(滿洲)는 우리영역(領域)이지 여진족(女眞族)의 지역이 아니다. 만주는 1700년까지도 유럽지도는 조선으로 되어 있고, 카톨릭의 교구도 45년 흑룡강(黑龍江) 길림(吉林)으로 되어 있다.
 
일제(日帝)침략을 몰아내기위해 미국(美國)에서 박용만 선생이 창립(創立)한 청년사관학교 교가(校歌)에도 흑룡강(黑龍江) 맑은 물....것과 같이, ()나라도 자기 땅이라 하지 못한 우리의 영토(領土)이지, 중국 영토도 아니다. 일제침략이 빚은 비극이 다른 민족의 땅같이 인식(認識)하고 있는데 만주(滿洲)는 통일 후 다시 찾을 우리 영토(領土)인 것이다.
 
우리는 너무 반도식민사관(半島植民史觀)에 취해 있는 우리의 역사의식이 문제다. 중국의 제1의 사서(史書)로 꼽는 사마천(司馬遷)사기(史記)진시황(秦始皇) 이전은 무조건 동이역사이다라는 공식(公式)이 성립한다. 따라서 옥락역사(沃樂歷史)는 삼국유사가 만든 역사임을 제대로 알아야하고, 고구려와 발해를 여진족 역사로 할 수 없는 것을 알고 말들을 해야 한다.
 
오늘은 송()나라 때 역사를 왜곡하기 위하여 남의 역사의 기록을 16줄이나 없애며 소동파(蘇東坡)같은 자가 일본(日本)이었던 타이완(臺灣) 지도를 빼는 등 동이 역사를 없애기 위해 조작하나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사, 삼국사는 중국대륙이 우리무대였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삼국유사 맹점은, 대륙사를 쓰지 않은 점이다
 
우리역사는 반도사가 아닌 대륙사임은 삼국사(三國史)남제서(南齊書), 중국25(中國25)고구리 백제가 남으로 오월(吳越) 북으로 유연제노(幽燕齊魯)를 다물(多勿)하였다는 기록을 외면하였다. 이는 도저히 납득이 어려운 일이다. 김일연(金一然)의 큰 실수는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가 지배(支配)한 오월유연제노(吳越幽燕齊魯)를 쓰지 않은 것이다.
 
김일연(金一然)이 소동파(蘇東坡)가 만든 역대지리지장도를 보았고, 삼국지(三國志)30도 보았다. 후한서(後漢書) (85)도 보았고,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를 보았다면 동이가 남제서(南齊書) (58)범위에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김일연(金一然)삼국유사(三國遺事)를 읽다보면 제일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 동이전에서 비중(比重)이 가장 많이 차지하는, 고구려(高句麗), 백제전(百濟傳)을 기록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신라(新羅), 가라(加羅-가야(伽倻))역사보다 더 많은 자료가 18() 동이전(東夷傳)전에 있다. 그럼에도 고구리사(高句麗史), 백제전사(百濟傳史)가 없다. 또한 왜인전(倭人傳)도 없다.
 
김일연(金一然)삼국지(三國志)의 위서(魏書)를 인용하고, 후한서(後漢書)에서 삼한(三韓)을 인용하고,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를 인용하였음에도 신라(新羅), 가라(加羅;가야(伽倻)를 위주로 쓰고, 고구려, 백제사(百濟史)는 없다. 가라(加羅=伽倻)는 중국18사에서 유일하게 남제서(南齊書)()58에 항목을 가지고 있음에도 가락국기(駕洛國記)를 마련하였는데 동이전(東夷傳)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고구려, 백제(百濟) 왜인전(倭人傳)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이는 신라(新羅)와 가라(加羅)를 반도에 맞추려는 의도(意圖)로 밖에 볼 수 없다. 삼국사(三國史)에는 삼한(三韓)과 고구려, 백제 가라(加羅), 신라, 왜를 모두 기록하고 있는데 김일연(金一然)이 왜()를 수록하지 않은 것은 이해를 하려 해도 고구려, 백제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지나18(支那18)에 고구려, 백제에 대한기록은 신라보다 월등히 많다.
 
그러함에도 전기(傳記)를 마련하지 않은 것은 상대사시중장(上大師侍中狀)에서 고구려, 백제를 무시하고 외면한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사실(事實)을 숨기고 감출 수도 없다.
 
그것은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가 남으로 오월(吳越) ()으로 유연제노(幽燕齊魯)를 통치하였다고 하였으나, 고구려 땅과는 상관이 없다고 보았을 가능성이다. , ()를 일본열도역사(日本列島歷史)로 알고 있었다면 당연히 왜()를 기록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될 것 같다.
 
그런데 18사의 왜인(倭人)은 일본열도(日本列島)인의 아니었다는 사실도 몰랐는가! 분명한 것은 고구려 백제가 유연,제노,오월(幽燕齊魯吳越)에 있었다면, 왜인(倭人)도 그곳에 있었다고 상상도 못해 보았다면 이해가 된다. 그런데 분명하게 이때 왜인(倭人)은 양자강 이남에 있었다.
   
김일연(金一然)삼국유사(三國遺事), 우리역사를 한반도에 맞추려 했다.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역사는 상고시대부터 삼국시대라는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를 한반도에 맞추어 역사를 보려는 경향이 있어 왔다. 그러나 삼국도 대륙에서 건국했지, 한반도에서 건국하지 않았다.
 
그런데 신채호(申采浩)선생은 조선사연구초에 동자(東字)는 서(西)로 바꾸고 서(西)는 동()으로 바꿔서라도 반도 안에 역사를 꾸몄다. 이런 풍조는 조선조에 와서부터이었다. 정약용(丁若鏞)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세종실록지리지를 참고하였으나 영역을 잘못 알고 있다.
 
가야(伽倻), 신라(新羅)역사 바로써야
 
가야(伽倻)와 신라(新羅)역사도 대륙에 사로(斯盧)신라가 있고, 한반도에 있는 신라(新羅)503년 이전 것은, 신라칸(新羅干)으로, 503년 이전, 32~503년까지 호동왕자(好童王子)와 낙랑공주(樂浪公主)의 비연(悲戀)의 역사가 있었던 최리(崔理)가 다스리는 낙랑국(樂浪國)이었다.
 
신라(新羅)는 대륙의 서신라(西新羅)와 서라벌(徐羅伐)의 동신라(東新羅)가 있었으나 대륙의 신라는 서기907년에 망하고 서기907~936년의 후삼국(後三國)시대가 있음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신라가 가야의 속국(屬國)이었다고 하면, 우리나라사람들은 역사의 진실을 모르면서 그럴 리가 있겠느냐? 할지모르나 대륙의 사로신라는 가장 약한 나라로 가야의 속국이었다.
 
그 한 예로, 김수로왕(金首露王), 사로국(斯盧國;(西新羅)의 사신(使臣)을 죽였으나 이 신라는 김수로왕(金首露王)에게 한마디말도 못했다. 사로국(斯盧國;新羅)은 가라속국(加羅屬國)이었다가, 고구려, 백제속국이 된다. 또한 신라는 307년 복국호(復國號), 신라(新羅)로 쓰게 된다.
 
신라의 기록은 대부분이 대륙의 기록이다. 거의 97%정도이다. 이런 것을 반도에만 신라가 있었다는 것은 신라역사를 모르는 것이다. 선덕여왕의 기록도 대륙의 기록이다. 당시 한반도의 신라는 고구려연방(聯邦)의 하나이다. 가한(可汗), ()은 다 제후국(諸侯國)이다. 여기서 한()은 광개토태왕 때 간()을 한()으로 하였다. ()시대와 간()시대를 구분해야 한다.
 
우리는 삼국시대를 나타내는 삼국사, 지나(支那)18동이전을 부정적으로 보고 우리역사를 김일연(金一然)과 신채호(申采浩)이론방식으로 한반도에 맞추려는 자세가 문제인데 이것은 삼국사와 그 시대를 나타낸 지나18사 동이전을 검증하고 정리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경주에서 금관이 나오면 이것은 신라왕들의 왕관이니 신라는 고구려와 동등한 나라로 인식하려고 한다. 이것은 유물로 본 결정이나, 사서(史書)로 보면, 경주에서 금관(金冠)이 출토된 것은 거서간(居西干)이나 마립간(麻立干)시대의 유물(遺物)이다. 혼동해서는 아니 된다.
 
신라왕(新羅王)이라고 했던 것은, 503년이니, 그 이전에 조성되었으면 분명히 마립간(麻立干)시대의 작품으로 신라왕시대의 유물과 다르게 구분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마립간(麻立干)이나 신라왕은 삼국사(三國史)에서 인용(引用)하고 있으나, 유물이 발견되면, 삼국사18사 동이전이 정립된 상태에서 가능하나, 신채호(申采浩) 방식으로는 구분(區分)이 되지 않는다.
 
이를 확인하는 것은 삼국사(三國史)()46의 기록이 진실인가? 확인하는 것이다. 다행히 지나(支那)18)동이전(東夷傳)중에서 남제서(南齊書)58의 내용이 삼국사(三國史)() 46과 일치한다. 다만 표현을 삼국사(三國史)46은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 지역을 다스린 제후국(諸侯國)으로, (),(), (), (), ()와 유주(幽州)로 나타나고 있다.
 
남제서(南齊書)58은 영평(營平), 광양 안국 낙랑(樂浪) 대방(帶方), 청하(淸河) 광능(廣陵)이라는 삼국지동이전의 한()위치에 의하여 결정되고, ()삼국지,후한서(後漢書) 동이 왜인전(倭人傳)으로 그 위치에 의해서 확인이 가능함으로 남제서(南齊書)58지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 사로국(斯盧國)663년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가되어, 천문기록이 당()에 뺏겨버린다. 그 때 한반도는 평화지역이었다. 역사는 주로 전쟁지역이어야 기록이 나온다.
 
우리역사는 왜곡을 할 수 없는 역사다
 
결론적으로 우리역사는 김일연(金一然)이나. 이승휴(李承休), 단재 신채호(申采浩)처럼 한반도에 맞추려고 해도 맞출 수 없다. 그것은 이미 기술하여온 바와 같이 우리역사는 삼국시대 지명(地名)이 존재하는 지역(地域)이 어디며, 인구(人口)로 본 역사에서나 군사력동원(軍事力動員)면에서나, 삼국(三國)과 장안(長安)의 교역(交易)기간이나, 삼국의 풍습(風習), 황충(蝗蟲)의 출현(出現), 신라와 백제의 홍수(洪水)시기와, 가뭄이 다른 점에서도 확연(確然)히 입증 된다.
 
장마의 경우를 봐도 왜()와 신라, 백제가 있었던 대륙은 장마의 시기가 4~5월부터 시작하는데 우리는 6~7월에 장마가 전라도나, 경상도 똑같이 온다. 역사기록은 이를 남기고 있는데 그곳은 열대(熱帶)지방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거기가 반도인가? 그곳은 대륙으로 반도가 아니다. 바로 대륙의 장마를 기록한 것이다. ()도 일본열도(日本列島)가 아닌 대륙에 있었다.
 
, 한무제(漢武帝;서기전142~86) 때부터 당태종(唐太宗)까지 발행된 모든 정사(正史)의 기록은 아무리 왜곡을 하고 숨겨도 숨기지 못하건만, 지금까지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 학자(學者)들이 김일연(金一然), 단재 신채호(申采浩)방식을 그대로 원용하여 역사를 왜곡한다.
 
일본열도(日本列島)의 역사를 만들기 위하여 우리역사를 반도로 축소시켰는데, 이를 따르는 무리가 지금 이 나라에 있는 것은 한심한 일이고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다. 역사가 반도식민사관에 의하여 망가지고 있는데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둠으로 우리역사는 잘못 되고 있다.
 
장마는 왜()가 있는 양자강 이남에서 서서히 올라와서 신라 백제를 거쳐 고구려영역에 장마가 오고, (), 신라지역이 장마가 시작하여도 백제와 고구려 영역에는 장마가 지지 않는 것은 이곳이 한반도(韓半島)가 아닌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이 제아무리 역사를 왜곡하며 그 지명(地名)을 숨기고 감추려 하지만 감출수도, 숨길 수도 없는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반도라면 홍수(洪水)가 났을 때 2~3일이면 그 물이 다 빠지나, 대륙에서 2~3개월 되어도 빠지지 않은 것은 우리나라가 삼국시대 대륙에 있었던 것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일식(日蝕)의 실 현지역이 어디인가! 에서도 다 밝혀지고 있다. 지금은 반도사관은 발붙일 곳이 없는 세상이다.
 
글을 맺으며
 
오늘 우리나라 역사는 광복73년이 되어도 제자리인 것은 국민의 자각도 문제라 본다. 너무 우리국민은 역사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제는 우리나라역사를 망치고 민족혼을 갉아먹는 패배의식과 열등의식을 조장하는 식민사관은 살아지도록 해야지, 너무 오래 동안 허송세월을 한 것을 뉘우치고 역사 바로 세우는데 국민이 나서야 한다.
 
중국인 학자도 우리가 중국전체를 차지한 것을 저서(著書)에서 남기고 있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반도식민사학자라는 자가 자기나라 역사를 폄하(貶下)하고 있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중국의 역사학자(歷史學者)인 서양지(徐亮之)교수는 중국인이면서도 그가 쓴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동이족(東夷族)이 중국전체(中國全體)를 차지했다고 다음 같이 말하고 있다.
 
은주(殷周)시대에 동이족의 활동면이 사실로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하북성(河北省), 발해연안(渤海沿岸), 하남성(河南省), 동남(東南) 강소성(江蘇省), 서북(西北) 안휘성(安徽省), 중북(中北) 호북성(湖北省), 동우(東隅) 요동반도(遼東半島), 조선반도(朝鮮半島)등 넓고 큰 지역을 포함하였다고 하였다.(中國史前史話)267).” 이곳이 반도인가! 반도사관자(半島史觀者)는 이에 대하여 답해야 한다. 언제까지 당신들은 민족의 반역대열에서 역사를 망가지게 할 것인가!
 
이순신(李舜臣)장군이 말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진실(眞實)의 힘은 생각보다 세다.”고 했다. 거짓은 결코 바로 설 수 없다. 우리는 동아(東亞) 9(九州)의 하나인 기주(冀州;北京地域)가 요하(遼河)의 서녘지역 이라 하였다. 우리가 우리나라역사와 동아(東亞)의 역사(歷史)를 올바로 알기 위하여 이 요하(遼河)의 위치를 정확히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지금부터 1400여 년 전 당()나라 때 까지만 하더라도 본래의 진짜 요하(遼河)는 현재 만주 요북성(遼北省)을 지나 영구(營口)에서 발해바다로 흐르는 그 요하(遼河)가 아니라 사실은 현재 중국의 찰합이성에서 시작하여 열하성의 승덕(承德) 근방을 지나 하북성((河北省;北京地域), 희봉구(喜峰口)에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뜷고 하북성 노룡현(盧龍縣) 서녘을 지나 발해(渤海)바다로 흐르는 난하(灤河)를 요하(遼河)라 하였던 것이다. 정신 차리고 역사연구를 해야 한다.
 
현재 만주(滿洲)에 있는 요하(遼河)는 그 본 이름이 구려하(句麗河;高句麗河), 구유하(枸柳河), 거류하(巨流河), 압자하(鴨子河=압록강(鴨綠江)이었다. 본래의 요하(遼河)인 난하(灤河)를 표준으로 하고 그 동녘은 요동(遼東)이라 하고, 그 서녘은 요서(遼西)라 하였다.
 
이 요하(遼河=난하(灤河)는 북경(北京)의 동녘이요, 또 산해관(山海關)의 서녘에서 흐르고 있음으로 북경(北京)은 요서(遼西), 산해관(山海關)은 요동(遼東)이다. 고대(古代)는 국경(國境)이 대개가 큰 강()이었음으로 옛날부터 중국사학자(中國史學者)들이 우리나라 지리(地理)와 역사(歷史), 또 중국(中國)의 지리, 역사를 몇 번이고 고쳐서 북경근방(北京近方)에 있는 요하(遼河)를 동()으로 가져가서, 만주(滿洲)의 구려하(句麗河=현재의 遼河)를 요하(遼河)라 하였다.
 
그들은 이래야만 북경지역(北京地域)이 본래 요하(遼河)로서 우리영토(領土)인 것을 부정하고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술책(術策)인 것이다. 이러한 지명(地名)의 이동(移動)과 역사왜곡(歷史歪曲)은 상상을 초월(超越)하리 만큼 제멋대로 자행(恣行)한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예컨대 요하(遼河)만이 북경지역이 아니라 낙랑군(樂浪郡)이 또한 북경지역(北京地域)에 있었다. 중국의 여러 정사(正史)에도 똑똑히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 명일통지(明一統志)라는 명()나라 것을 보면, 조선성(朝鮮城)이 영평부경내(永平府境內)에 있었는데 이 영평부(永平府)가 북평군(北平郡)에 소속 된 것이며 또, 북연(北燕), 이 북평군(北平郡)을 평주(平州)와 낙랑군(樂浪郡)으로 나눴다가 후위(後魏)가 낙랑군(樂浪郡)을 고쳐서 북평군(北平郡)이라 하였다.
 
이같이 중국과 일본은 자기들의 역사열세를 왜곡조작으로 제멋대로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김일연(金一然)과 신채호(申采浩)도 역사를 깊이 연구하지 않고 삼국사(三國史)를 부정적(否定的)으로 보며, 반도(半島) 안의 역사(歷史)로 한 것은 국가발전에 천추(千秋)의 한()이 되고 있다.
 
신라 백제의 홍수의 기록이 잘못 되었으니 자연과학에 대한 것은 빼고 누가 왕이 되었느냐?’ 에 초점을 두고 동서양자 상환고증이라하며 삼국사를 부정적으로 보게 한 것은 큰 과오이다.
 
일연(金一然)의 삼국유사는 삼국부터 시작해서 고조선이 없다. 또 우리고구려 백제가 유연제노오월(, , , , , )을 다물(多勿)한 것을 빼었다. 신채호(申采浩)의 반도에 맞춘 것은 우리 이상을 없앴다. 이런 역사만을 역사라는 반도식민사학자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한반도역사는 5%밖에 안 나온다는 것을 제대로 알고 역사를 말하기를 기대해 진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東夷歷史 ’. (右犂)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九犂系, 新羅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日本史’. 吳在成 編著, ‘지도로 보는 우리나라역사(東夷疆域圖)’.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國會 文公分科委員會, 國史敎科書內容要求請願-國史公聽會 陳述人 發言內容.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김동락, ‘천부경과 문디거시기’. 황순종,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이강민,‘대한국고대사’.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李進熙’ ‘好太王碑’.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歷史’. 石井進外3,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延長-, ‘古代日本史’. 秋山謙藏, ‘日本歷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べる日本史’. 槐一男, 永原慶二 監修, ‘絶對 中學社會歷史’. 杉山徹宗, ‘眞實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歷史. , . 李民樹,'朝鮮傳‘.外 其他多數書冊參照, 本文引用 함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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