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예맥조선(銳麥朝鮮)이 동주시대(東周時代)부터 한무제시대(漢武帝時代)까지 1천여 년 동안 중국을 정벌, 정복, 지배한 사실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이 중국사에 명기 돼 있음은 앞서 기술한 바와 같다. 오늘은 춘추전국시대에 예맥조선과 중국의 진(秦), 수(隨), 당(唐) 등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은 이민족(異民族)의 정벌을 받아 거의 멸망의 위기에 직면한다. 그 때 제환공(齊桓公)의 신하 관중(管仲)에 의해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공자가 ‘관중(管仲)이 없었다면 중국은 멸망돼 우리가 피발(披髮)하는 되놈이 되었으리라’고 말했다.(論語 卷 14 憲問 第14). 당시 중국을 정벌한 민족은 예맥(銳麥)이었다. 이 사실을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기록하고 있다. 양계초(梁啓超)도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는 “춘추시대에 동이가 중국을 정벌하다가 제환공(齊桓公)에게 패하였다”고 했다. 공자의 말에 의하면 예맥(銳麥)이 중국을 거의 멸망케 한 민족은 피발민족(披髮民族)이다. 그 주역은 예맥(銳麥)이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우리가 그 땅에 먼저 거주한 선진 강대국이었으나 중국 통일 후에는 끊임없는 공방이 벌어졌다.
시전(詩傳) 필 궁9장(宮9章)에 신안호(新安胡)가 예맥(銳麥)의 노(魯) 나라 정복사실을 적시했다. 사기(史記)에서는 태사공(太史公)이 연(燕)나라가 북으로부터 예맥(銳麥)의 압박을 받아 거의 멸망에 직면한 때가 수차례라고 했다. 사기(史記 三十四 燕召公 世家第四)에는 또 연(燕)이 예맥(銳麥)의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史記 百二十九 貨殖列傳第六十九) 이는 예맥(銳麥)이 경제적으로 연(燕)보다 더 상위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또한 조착(晁錯)이 한문제(漢文帝)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진(秦)이 중국을 통일한 후 예맥(銳麥)과 남월(南越)을 공벌(攻伐)한 것은 국경을 방위하고 민중이 죽는 것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넓은 영토를 얻으려는 탐욕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성공치 못하고 천하가 혼란에 빠졌다. 그 뿐만 아니라 진(秦)은 병사(兵事)에 대한 형세를 알지 못해 싸우면 적에게 포로가 되고 주둔하면 사병이 전멸 됐다”(자치통감(資治通鑑 卷十五, 漢紀 七, 太宗孝文皇帝下) 중국을 천하 통일 하고서도 진(秦)이 왜 41년 만에 망했는지 우리는 여기서 잠시 그 상황을 살펴보고 가고자 한다.
진(秦)이 망한 원인은 예맥(銳麥)을 감당 못한데 있었다
진(秦)시대부터 China 문자를 사용한 진(秦)이 망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외세로는 예맥(銳麥)과 남월(南越)과의 무모한 전란으로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었고, 내부적으로는 진(秦)이 강권으로 국민을 억압한 결과에서였다. 진(秦)이 예맥(銳麥)에 밀린데 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예맥인(銳麥人)은 추위에 강하고 남월인은 더위에 강했다. 그러나 진의 국토가 중국이 주장하는 영역이 아니었다. 중국의 남서쪽은 추위에 약해 이를 견디지 못했다. 전방에서 수비하는 병사는 변방에서 죽고 후방에서 수송하는 부대는 길에 쓰러져 죽었다. 따라서 진의 국민들이 전쟁에 출전하는 것을 사형장에 가는 것 같이 두려워해서 도망했다고 한다. 이에 진은 죄인을 징발해 출전케 하니 이것이 소위 적술(謫戌)이다. 적술(謫戌)은 귀향 살이 군인이라는 뜻이다. 적술(謫戌)을 징발하는 순서는 먼저 관리 중에 죄 있는 자와 다음에 데릴사위(가난한자), 그리고 다음에 상인, 그 다음에 과거 상인의 아들과 손자, 이어 동리 좌측에 사는 자(가난한자)를 징발했다. 그런데 그 징발이 순서대로 되지 않아 출전하는 자가 분원(憤怨)을 품어 해(害)가 있었을 뿐이었다. 더욱이 전사자에게는 한 푼의 보상이 없었다.
이에 진(秦)은 국민들의 극렬한 화(禍)가 미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불평불만이 고도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 때 진승(陳勝)이 대택(大澤)에서 혁명군을 일으켜 진(秦)을 타도하자고 외치니 천하가 유수같이 호응하고 나섰다. 이는 진(秦)이 국민을 돌보지 않고 강권으로만 국민을 억압한 폐해(弊害)의 결과였다. 이후 중국의 사가(史家)들은 진(秦)을 타도한 자는 진승(陳勝)과 항우(項羽)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진(秦)이 예맥(銳麥)과 남월(南越)의 전란으로 혼란에 빠진 것을 계기로 진승(陳勝)과 항우(項羽)가 진(秦)을 타도했을 뿐이다. 중국은 이를 표면적으로 선전해 온 것이지만 실제로 진(秦)을 타도 한 민족은 예맥(銳麥)과 남월(南越)이었다. 한서(漢書)에서도 엄우(嚴尤)가 왕망(王莽)에 대해 부여(夫餘)와 예맥(銳麥)이 다시 일어나면 대우(大憂, 크나큰 우려)라고 언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漢書九十九中 列 傳 六十九中 王莽) 여기서 대우(大憂)는 대 정벌(征伐)을 말 하는 것이다. 즉, 부여(夫餘)와 예맥(銳麥)이 한(漢)을 크게 정벌(征伐)한 것을 의미한다.
중국이 패한 역사를 승리했다고 기만하는 ‘허구’
또한 한서(漢書)에는 예맥(銳麥)이 한(漢)나라 문제(文帝), 경제(景帝) 시대에 한(漢)을 정벌해 많은 해를 끼쳤다고 기록돼 있다.(前漢書 七十八 : 소망전(蕭望傳) 第四十八) 즉, 소망(蕭望)이 예맥(銳麥)에게 신(信)을 지키고 양보하는 것이 국가 보존의 양책이라 주장하니 천자가 그 주장을 채택했다고 한 것이다. 고구려 모본대왕시대(慕本大王時代)에 고구려군(高句麗軍)이 한(漢)나라 요지(要地)인 태원(太原)을 점령하니 요동태수 채동(蔡彤)이 항복하고 배상금을 고구려에 받치기도 했다. 그런데 후한서(後漢書)에는 채동(蔡彤)이 은신(恩信)으로 불려 항복받았다고 기록했다.(後漢書八十五 : 東夷列傳 第四十八) 즉, 배상금을 은신(恩信)이라 표현했다. 일방적으로 중국이 인류의 종주국이라 자처하는 중국인은 패한 것을 승리했다 기록하고 배상금을 은신(恩信)이라 기록하는 상습이 있었다. 이는 중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 같이 중국의 역사 왜곡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면 예맥(銳麥)에게 신(信)을 지키고 양보하고 나선 것은 한나라가 예맥(銳麥)에게 배상금을 바치고 영토를 양여(讓與)했다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을 정복해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후에 진번, 임둔, 현토 등 삼군(三郡)을 예맥(銳麥)에게 빼앗긴 사실도 예맥(銳麥)이 한(漢)을 제압한 것을 증거한다. 또한 예맥(銳麥)은 후(候), 읍(邑), 군(君)이라는 3(三)부족이 연합해 통치했다. 그런데 한무제(漢武帝)가 많은 재물로서 군(君)이라고 하는 부족 남녀(南閭)를 매수해 창해군(倉海郡)을 설치했다가 1년 반 만에 철수한 것도 한족(漢族)이 무력으로 예맥(銳麥)을 감당치 못했었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예맥(銳麥)은 이처럼 중국과의 쟁패전(爭覇戰, 오랜 기간 패권다툼)에서 한족을 정벌하고 정복·제압한 사실이 중국역사에서 판명되고 있다.(史記二十七, 天官書第五) 재론하면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漢四郡) 등은 예맥조선(銳麥朝鮮)에 예속됐었다.(최인 著. 한국사강의(韓國學講義) P78참조).
한민족(韓民族)은 진(秦),수(隨), 당(唐)과의 쟁패전(爭覇戰)에 승리
한민족(韓民族)은 진(秦), 수(隨), 당(唐)과의 쟁패전(爭覇戰)에서도 승리했다. 주지하다시피 중국 역사상 가장 강대한 시대가 진(秦), 수(隨), 당(唐) 시대다. 이때도 우리는 중국에 패하지 않았고 쟁패전(爭覇戰)에서 우리가 늘 승리했다. 진(秦)은 중국을 첫 통일하고 국위를 떨치었다. 오늘날 중국을 지나(支那)라고 부르는 것은 진(秦)이라는 명칭에서 나온 것이다. 즉, 진(秦)은 중국을 대표한 명칭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강대한 나라요,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대제국이었다. 수(隨)나라는 강대한 오호(五胡)가 300년 동안 남북조로 분열시킨 것을 재통일한 나라였고 당(唐)은 수나라 보다도 더 강한 중국 역사상 특기할 강국이요, 세계사 역사에 기록될 강국이었다. 그리고 당태종(唐太宗)은 중국 역대 제왕 중 제1인자로 칭하는 제왕이었다. 당태종은 돌궐(突闕)·고창(高昌)·토곡혼(吐谷渾)·설연타(薛延陀)를 정복하고, 철륵(鐵勒)·회흘(回紇)을 예속시켰다. 그 중에 회흘(回紇)은 문자가 있고 당이 공주를 하가(下嫁)한 강대국이었다. 이 같이 중국 역사상 가장 강성한 시대가 진(秦) ,수(隨), 당(唐) 시대이다. 그러나 예맥(銳麥)이 진(秦)을 타도했다. 그리고 고구려는 수(隨)의 4차례침입도 막고 수양제(隋煬帝)가 이끄는 30만 정예부대도 몰살시켰다. 당시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에 불과했고 이로 인해 수(隨)나라는 37년 만에 망하고 만다.
수(隨)를 이어 당(唐)나라 역시도 고구려를 침범했으나 패한 사실은 천하공지의 사실이다. 당태종(唐太宗)도 우리를 당하지 못했고 그가 죽으면서 유언으로까지 “다시는 고구려를 침범하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이와 같이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중국역사상 가장 강대한 진(秦), 수(隨), 당(唐)을 제압했다. 이는 우리민족이 한족(漢族)과의 쟁패전(爭覇戰)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도 우리를 향해 지방 정권이니 중국의 제후국이란 말을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진(秦), 수(隨), 당(唐)을 동양의 패자(覇者)라고 한다면 동양의 패자(覇者)를 이긴 한민족(韓民族)은 동양의 제패자(制覇者)이다. 중국은 고대부터 후안무치(厚顔無恥)의 말도 안 되는 우리 역사를 파렴치(破廉恥)하게 제멋대로 조작·변조하고 있다. 지난 2012년 7월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시에서 발견했다는 작은 광개토대왕비도 비밀리에 비공개로 조작할 기미가 보이고 있다. 일본이 유물을 만들어 땅에 묻었다가 7만전 유물이라고 발표하며 조작하려다 발각된 것같이 중국역시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가 지방정권이라는 정신병자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중국은 역사변조와 왜곡을 하기 위해 또 다시 중국의 학자가 아닌 자들에 의해 다시 작은 광개토대왕비를 조작하고자 하는 역사 도둑질을 하려하고 있다. 중국이 떳떳치 못함은 중국역사가 가짜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역사는 엄연히 살아있다. 중국의 변조를 방관만 할 수 없다
우리는 중국의 이런 변조를 방관만 할 수 없다. 우리 역사는 엄연히 변할 수도 가감 할 수 없는 것이다. 당태종도 임종하면서 유언까지 할 만큼 강대한 고구려를 중국은 지방정권이라 하고 발해도 지방 제후국이란 말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불성설이다. 억지로 역사를 꾸려가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강력히 배격한다. 왜 중국은 그토록 야비한 짓을 하는 것인가. 중국은 참으로 떳떳하지 못한 가운데 오직 힘만을 내세워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비공개리에 연구를 하는 것인가. 우리는 이런 이웃나라들의 강도 같은 만행을 좌시해서는 안 되고 중국의 비열한 만행을 절대로 용납해서도 아니 된다. 이제 우리는 그들보다 더 연구하고 역사를 소중히 해서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되찾아야 한다. G. 하비와 H.로이드(Gabriel Harvey, Humphrey Lloydis)는 “자기조국을 모르는 것보다 더한 수치는 없다”고 했다. 우리는 자기조상을 바로 알고 조상의 역사를 바로 전하는 것이 애국애족의 길임을 자각해 다짐하고 역사를 바른 궤도에 서게 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조상이 세우고 닦은 우리 선조에 대한 우리의 할 도리이며 우리가 지키고 가야 할 책무다. 이 빛나는 역사를 길이길이 지키고 이어가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 이를 소홀해서는 조상을 욕보이는 것이기에 오늘도 선조들의 역사를 더듬어 가야 하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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