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기(阿直岐)는 백제임금이 왜(倭)에게 선물하는 길들인 2마리 말(馬)을 가져 간 사람이었다. 아직기(阿直岐)가 말(馬)도 잘 다루고 한문(漢文)에 유식한사람이었음으로 왜왕(倭王) 오진(應神)은 그에게 공부스승이 되어줄 것을 청(請)했고 스승이 된 아직기(阿直岐)에게 질문을 한다.
왜왕(倭王;應神)이 묻기를 “백제(百濟)에는 당신 말고도 학문에 유식한 사람이 있소? 여기에 아직기(阿直岐)는 왕인이 나보다 낫소이다.”하고 왕인을 추천해 그 다음해에 왕인이 왜(倭)로 임금을 가르치러 천자문(千字文)·논어(論語)·바둑」벚꽃 등 12개를 가지고 가서 학업의 신이 되고 그는 일본사관(日本史官)의 시조가 되었다. 또 후손들은 독점적으로 학문에 종사 했다.
왜(倭)는 부여(夫餘)의 기마민족(騎馬民族)이 369년에 왜(倭)로 가서 왜(倭)의 절반을 점령하고 그 후예들이 통치하고 있었던 시대라고 하는데 이들은 무인(武人)으로 한문(漢文)을 아는 유식한 사람들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때 일본이 장황하게 말하는 진구우 황후(神功皇后)가 아들 오진(應神)과 같이 왜(倭)로 건너왔다고 하고 있다.
진구우황후(神功皇后)가 왜(倭)로 건너온 목적은 자기 아들 오진(應神)에게 왜국(倭國) 통치자(統治者)의 자리를 마련해주려고 왜(倭)로 건너와서 부여(夫餘)의 기마민족(騎馬民族;가야족)이 왜(倭)를 건국했는데 진구우(神功皇后)의 아들 오진왕대(應神王代;363~394)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 일본역사에 공식적인 왕으로 기록된 오진(應神)과 그의 후대를 이은 임금들은 오늘도 일본 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507년 왕위에 오른 일본이 말하는 26대 케이타이(繼體)이전 25대 부레츠(武烈)는 4세기에 왜(倭)에 온 순수 부여·백제·신라 혈통의 기마민족 계열과 그보다 앞서 1세기경부터 왜국에 정착한 한국계 간의 왕권 투쟁에서 타협 안으로 채택된 인물이었다고 한다.
서기 507~527년까지 재위(在位)한 케이타이(繼體)왕은 기마족의 딸을 왕후(王后)로 맞고 그 사이에 출생한 김메이(欽明)가 29대 왜왕(倭王)이 되었다. 그의 통치 때 소가(蘇我) 가문이 왜국(倭國)의 실권자가 되었다. 소가(蘇我) 집안은 오진왕(應神王)의 실제 부친(父親)인 것으로 보이는 다케우치노 스크네(武內宿禰)의 직계손(直系孫)이었다고 하고 있다.
이 다케우치노 스크네(武內宿禰)는 진구우황후(神功皇后)의 생존 시 그녀와 협력해 섭정정치(攝政政治)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은 일본열도에서 왜(倭)가 있었던 것으로 왜곡한 역사는 허구이며 위에 쓴 영역도 일본열도가 아니라 대륙의 왜(倭)의 역사임을 밝히려 한다.
일본문화 근원은 부여 기마민족인 가야·백제이다.
일본에 전래된 역사와 문화 종교 특히 6~7세기 문화의 원류는 바로 부여(夫餘)·가야(伽倻)·백제(百濟)가 원류(原流)이다. 이 당시는 우리나라로부터 문자와 의학지식 외에도 종교적 조각과 회화(繪畵), 예술도 불교적 건축이 성행하고 궁궐도 절(寺)건축이 성행하는 시대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6세기 중엽까지도 불교를 접하지 못한 상태였다. 369년~506년까지 왜국(倭國)은 우리나라 혈통의 왕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철기사용과 군사전략에서 원주민보다 월등했던 기마민족(騎馬民族)인 부여족 가야(伽倻)가 369~370년에 걸쳐서 왜국(倭國)을 손쉽게 정벌하고 왜국(倭國) 최초의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하고 ‘신성한 왕권’을 누렸다고 하고 있다.
부여족(夫餘族)이 왜국(倭國)에 전파한 문화는 불교이전의 무속문화권(巫俗文化圈)으로, 말(馬)
을 숭배하고 강력한 통솔력(統率力)과 대형 봉분(封墳)매장제도를 지닌 것이었다. 컬럼비아대
학의 개리 레저드(Gan Ledyard) 한국어교수는 ‘후루’란 말은 ‘부루’ 또는 ‘부여’를 이르는 것
이다. 하며 부여족(夫餘族)이 일본을 정벌한 연대를 정확하게 369년으로 제시하고 있다.
일본은 부여족(夫餘族) 혈통을 보다 일본적인 화족(和族)혈통으로 변조하는데 정당성을 주기
위해 720년 관찬사서(官撰史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닌도크 덴노(仁德天皇)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日本書紀)」 편찬자들은 역사 변조를 위해 부여족(夫餘族)이 왜(倭)를 정벌하여 생긴 왕권교체기에 어떤 왕들은 몇 백 년씩을 살았다고 조작하였다.
그리고 오진(應神)은 진구우황후(神功皇后)가 우리한민족을 정복한 뒤 10개월이 훨씬 지나서
출산한 아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진구우황후(神功皇后)가 우리한민족을 정복하였다는 것은 날
조된 것인데 사실은 그 반대로 부여 기마족이 왜(倭)를 정복하고 야마토 정부를 건설하였다.
이 부여(夫餘) 기마족(騎馬族)은 506년 내부분열로 부여족(夫餘族) 왕권(王權)이 끊어질 때 까
지 왜(倭)를 보다 조직적으로 통합되고 개선된 군사력을 갖춘 국가로 이끌었다고 하였다. 부여
족은 무속(巫俗)을 신봉하고 있었으며 불교는 그 때까지 왜(倭)에는 전래되지 않았다.
일본은 ‘만세일계(萬世一系)’혈통의 첫 왕으로 진무(神武)가 서기전 660년의 일로 돌려, 무려
1000년이나 건국연대를 올려놓고 있으나 모두 허구의 거짓말이다. 때문에 필자가 유학시절 같
은 법학을 연구를 하는 사사기 유이치(笹木有一)와 대화하며 닌도쿠왕릉(仁德王陵)을 발굴하면
일본역사를 더 잘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라(奈良)고분들은 발굴이 금지되고 있었다.
일본은 역사를 왜곡하며 절대로 발굴을 않는 이유는 발굴하면 가야양식의 금관이나 귀걸이가
나온다든가, 가야, 백제 토기와 같은 유물이 나오면 일본왕실로서는 난처한 일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자랑하는 이 닌도쿠왕릉(仁德王陵)은 부여계통으로 가야(伽倻)의 왕릉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런 역사의 진실을 숨기며 21세기가 되었는데 자유로워져야 할 역사의 진실을 철저
히 숨기려 한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숨길 수 없다. 이제는 이런 거짓역사를 청산하고 일본
인들에게도 진실을 알도록 일본의 역사가 명치유신의 잔재를 깨끗이 청상하도록 해야 한다.
동양사학의 최고권위자(東洋史學最高權威者)로 소화왕(昭和=裕仁天皇)이 태자시절 스승이었던
사사가와 린푸(笹川臨風) 박사는 최태영(崔泰永) 선생이 1920년대 메이지대학(明治大學)유학시절 이 대학교수로서 역사에 관한 대화 중 궁내성(宮內省) 도서관에 조선에서 가져온 사서(史書) [상기(上記)에는 ‘단군의 73대손 오진(應神)이 일본의 첫째 왕이 되었다고 쓰여 있다고 하였다.
일본(日本)은 우리유민(流民)이 세운나라이다
일본의 왕통이나 역사는 허구(虛構)라는 것을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고대 일본이 대륙에 왜(倭)로 있을 때 부여족(夫餘族)이 가야(伽倻)출신 귀족과 혼사를 맺으며 신라(新羅)가 가야(伽倻)를 합병한 서기562년 까지 가야(伽倻)에 대한 영향력을 가졌다.
이미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박사가 유교를 왜에 심었는데 6세기 오경박사(五經博士)가 왜(倭)에 유교(儒敎)가 지배자(支配者) 층(層)에 정치이념으로서 보급되고 선진 백제로부터 천문(天文), 역(易), 역(歷), 의학(醫學)을 전해지면서 왜(倭)도 수(隨)와 당(唐)이 기마민족의 제도 받아들여 발전한 것 같이 왜(倭)도 우리 제도를 도입하여 많은 변화와 발전을 하게 되었다.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이 한자(漢字)를 왜(倭)에 가르치고 이들이 5세기 초 왜(倭)에 와서 학문의 바탕을 닦은 두 백제인 이었다. 또한 왜(倭)는 불교(佛敎)의 전래(傳來)와 대륙문화(大陸文化)의 전래(傳來)는 왜(倭)의 모든 제도도 우리와 같은 제도로 탈 바뀜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때부터 왜(倭)는 문명(文明)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역사에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도 나와 있는 바와 같이 552년 왜(倭)가 백제로부터 불상(佛像)과 경문(經文)이 전해짐에 따라 불교는 유민으로부터 호족(豪族)들에게 전해져 크게 번져가게 되었다. 이 당시 대륙의 정세는 당(唐)이 618년 성립과 인접한 신라가 강해짐에 따라 왜(倭)는 신라를 두려워하던 때이다. 이후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게 된다.
백제가 망한 후 그 유민(流民)이 백제를 떠난 부여족 후예들이었다. 백제인구 상당부분이 왜(倭)로 피신해 온 것인데 이들은 지적(知的)으로 유능한 전문가 다수가 왜(倭)로 피신 온 것이다. 당시 백제로부터 많은 인재(人材)의 유입(流入)은 7세기 들어 불교국가를 표방한 일본의 불교예술과 건축, 기술 등 이후 일본문화(日本文化)를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백제유민이 유입(流入)으로 원시생활을 하던 왜(倭)에게 새로운 기술과 도구(道具)에 의해서 철제(鐵製)와 농업의 기술이 농수(農水)를 위한 저수지(貯水池), 용수(用水), 또 도자기(陶磁器)의 제도(製陶), 수혜기(須惠器), 건축, 조선(造船), 옷을 짜는 기직(機織)등의 기술이 전해졌다.
왜(倭;大和)라는 야마토(大和)국가는 우리유민(流民)이 가서 세운 연합국가(聯合國家)이었다. 이 연합국가의 주체가 가야와 백제인인 것은 숨길 수 없다. 이 야마토(大和)국가는 각지의 호족(豪族)이 왜(倭)지역의 유력한 호족(豪族)을 중심으로 연합(聯合)해서 나라를 세운 것이다.
그 유력자는 다른 호족(豪族)의 위에 서게 되었고, 스스로 대왕이라 했다. 야마토(大和)국가의 정부는 야마토조정(大和朝廷)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 정권의 구조는 씨성제도(氏姓制度)로서 씨(氏;豪族)는 토지와 인민(部民), 노예(奴隸)와 노비(奴婢)를 가지며 조선(祖先)을 씨(氏)라는 집단을 만들어 갔다. 7세기말 이 귀족층의 30%가 외국인 성씨를 가진 사람이었다고 한다.
씨성제도(氏姓制度)에 있어서 성(姓)은 각기 씨(氏)에는 성(姓)이라 부르는 명(名)이 있었다. 대왕이 출현하게 되자 성(姓)은 신분상하를 나타내게 되었다. 더욱이 유력한 씨(氏)에는 신(臣)이나 연(連)등의 성(姓)이 주어 졌다. 호족은 군(君)이나 직(直)이라는 성(姓)이 주어져서 국조(國造), 현주(縣主)라는 역(役)이 주어져 그 지방을 다스리고 조정에 공물(貢物)을 바쳤다.
현재 일본은 고고학(考古學)을 말하면서도 고대천황이 한국계혈통으로 이어져 왔음을 생각지않으려 한다. 현재 일본 역사교과서가 맞는다면 고분발굴과 연구를 제대로 하면 된다. 고고학은 지난날 일왕의 존재를 제대로 밝혀 낼 도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기피한다.
지금까지 고고학연구에서 밝혀진 것은 5~7세기 대륙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왜(倭)보다 월등히 앞선 선진국이었다. 때문에 일본은 왕들 고분의 발굴을 엄격히 금지되어있다. 이는 정복자 부여기마민족1세인 오진왕(應神王)이나 2세 닌도크왕(仁德王)능이 발굴된다면 가야양식의 금관이 나올 수 있고 다른 유물에서 허구역사의 허울을 벗길 수 있음을 두려워한다.
일본 중앙집권체제 주체는 기마민족이었다
고대 왜(倭)가 양자강이남에서 원시생활을 할 때인 3~4세기 상당수의 부여기마민족이 왜로 유입 되었는데 이들은 부여기마족의 지배층으로 왜에 다대한 영향력을 일으키고 7세기후반 많은 백제유민이 왜(倭)로 와서 670년 일본국을 건설한 계기로 일본은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된다.
양심적인 일본의 학자들도 8세기 이후 중국이 일본문화의 종주국으로 나서기 이전까지 우리가 일본문화의 주체인 것을 규슈대학(九州大學)의 다무라(田村)교수는 양심적으로 1982년 출판된 저서에서 일본인들이 숨기는 이 사실을 말함으로 책을 출판 직후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일본 풍토는 오랜 세월동안 허구의 역사를 배움으로 역사 진실을 말하면 싫어하는 것이 일본인들의 속성이 된 것 같이 되어 일본 왕이 부여기마민족과 가야 백제계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을 싫어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기에 바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은 대륙의 역사를 숨기기 위하여 고사기와 「일본서기」, 「만요집(萬葉集)」을 닌도크왕(仁德王;395~427~쥰인왕(淳仁王;758~764) 간(間)에 만들어진 화가(和歌) 약 4500수(首) 수록(收錄)된 것인데 편자(編者)는 불명(不明)하고 성립 연대는 나라시대(奈良時代) 후반이다.
712년 일본 텐무왕((天武王)의 명으로 쓰여졌다는 「고사기(古事記)」는 스이코왕(推古;592~628)까지 황실에 얽혀진 설화(說話)가 기술(記述)된 3권으로 되어 있는데 5~6세기의 제기(帝紀), 구사(舊辭)가 개작(改作)되어서 편찬된 안만려(安萬呂)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일본은 3~4세기에도 석기시대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우리민족의 도래로 논농사와 청동기 금속시대로 돌입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기전4세기 이전에 이미 이러한 문명을 갖고 있었다. 우리에게 철기와 청동기, 도자기의 물레사용법을 익힌 3세기를 일본사회는 야요이시대라 부른다.
그런데 일본에 중앙집권체제가 등장한 것은 기마부여족이 왜로 간 후에 일이다. 부여족 이전의 오진왕(應神王)이전의 왜국(倭國)은 느순한 부족사회로 중앙집권 개념의 국가(國家)는 미처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일본의 고대사회 야마토국가가 율령(律令)정치제도를 성립시킨다.
컬럼비아대학의 개리 레저드(Gan Ledyard)교수에 따르면 부여족이 일본을 통치한 시기는 서기 369년부터 506년 까지라 하는데 이는 오진왕(應神王)때부터 게이타이왕(繼體王)이전에 이르는 것으로 일본 진무천황이라는 왕이 오진왕(應神王)인데 일본은 천년이나 늘려 각색 했다.
진무(神武)가 서기전 660년 일본의 첫 왕이라는 것은 허구(虛構)의 왕으로 이 당시 일본사정은 이미 밝힌 그대로 나라를 세울 힘도 능력도 없는 원시부족사회상태였다. 이후 369년 부여기마족(夫餘騎馬族)이 창과 칼등 월등한 무기와 기마병을 앞세워 원주민을 제압하고 지배할 때까지 왜(倭)는 초기에 말(馬)도 없는 사회이었다. 그런데 왜(倭)에 온 부여족들은 달랐다.
이들은 군사집단이었으며 새로이 정착 할 신천지를 찾아 왜(倭)에 간 것이었다. 이들이 옴으로 인하여 왜(倭)가 4세기부터 엄청난 변화를 가져 온 것을 숨길 수 없다. 4세기에 왜(倭)로 건너온 부여기마족(夫餘騎馬族)에 의해 철과 말의 용도도 알게 되었다.(以上은 카터 코벨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29~45面 外 多數史書 參照, 本文引用 하였음을 밝힙니다.)
글을 맺으며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에 있어서 존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1910~1996) 박사와 그의 아들 앨런 카타 코벨(Alan Carter Covell) 박사가 1978~1986년의 연구한 결과는 ‘4세기 우리의 기마민족(騎馬民族)이 일본(日本)을 정벌(征伐)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코벨박사 모자(母子)는 이를 증명하는 예(例)로 말(馬), 유물(遺物), 유적(遺跡)과 일본(日本)의 이소노가미(石上神宮)의 칠지도(七支刀)를 언급한다. 이 칠지도(七支刀)는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그의 친족(親族) 신공(神功)에게 내린 징표(徵表)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은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도쿄대(東京大) 교수가 1948년에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코벨(Covell) 박사는 기마민족의 신공(神功)이 왜(倭)를 정벌한 신라 왕가의 여걸(女傑)이라고 단정하고 있는데 필자는 부여기마민족(夫餘騎馬民族)으로 보고 있다.
어떻든 왜(倭)는 4세기부터 대륙에서부터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670년 타이완(臺灣)에서 일본(日本)이라는 국호(國號)를 써도 좋다고 당(唐)으로부터 승인받고 쓰다가, 1403년에 다시 명(明)이 왜인전(倭人傳)을 일본에 주면서 이 때부터 일본열도에서 일본의 국호를 쓰게 되었다.
일본은 5세기 초 왜(倭)로 있을 때 백제(百濟)로부터 문자(文字)와 유교(儒敎)의 전래(傳來)와 6세기에 불교(佛敎)의 전래(傳來)로 왜(倭)는 모든 분야에서 대 혁신을 하게 된다. 이를 받아들여 발전하게 되는 야마토정권(大和政權)은 부여기마족(夫餘騎馬民族)과 백제의 제제도(諸制度)를 받아들여 획기적인 발전을 한 것을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다.
코벨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현재 일본에서 자랑하는 국보가 모두 한인의 손에 의해서 이뤄졌음을 밝히고 있는데 그는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강조하며 1천 수백 년 간의 지배이념이던 불교에서도 그 저변에 무교(巫敎)가 있음도 외국인으로서 일본문화를 연구하다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같은 조상을 가진 민족으로 서로 미워해서는 아니 되는 동족이다.
최태영 선생은 일본 불교는 백제에서 간 불교로서 신사(神社)는 무교(巫敎)의 한 끝이고 일본국 건설은 우리가 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 문화는 한국에서 간 문화이다. 우리나라에 없어진 수많은 고대 무화재를 잘 보관해온 일본사람의 덕(德)인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한국과 일본은 고대 같은 조상을 가진 민족으로 남이 아니다. 우리는 왜(倭)를 일본역사로만 봐 왔으나 역사를 바로 연구해보면 일본은 우리역사다. 왜(倭)는 우리78제후국의 하나이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九犂系, 新羅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倭-日本史’. 吳在成 編著, ‘지도로 보는 우리나라역사(東夷疆域圖)’.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國會 文公分科委員會, 國史敎科書內容要求에 關한 請願-[國史公聽會 陳述人 發言內容].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김동락, ‘천부경과 문디’ 거시기’. 황순종,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이강민,‘대한국고대사’.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石井進外3人,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學べる日本史’. 槐一男, 永原慶二 監修, ‘絶對 中學社會歷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上. 中, 下. 李民樹,'朝鮮傳‘.外 其他多數書冊을 參照, 本文引用 함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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