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첫 중앙집권체제, 부여족통치에 의해서다

입력 2019-05-04 09:3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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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교수
중국과 일본의 역사를 보면 너무 미화하고 제멋대로 만들어 낸 허망
(虛妄)하고 과장된 역들인데, 우리는 그들의 잘못된 역사적 실상을 제대로 보고 말을 해야 한다. 그들의 잘못된 역사기록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따라가면 허구 속에 매몰되어 국가의 나아갈 미래도 망각하고 만다. 지금도 중국, 일본이 왜곡한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수치이다.
 
중국은 과거 수천 년의 역사에 있어서 어떻게 침략하고 약탈·학살·차별·학대·지배하며 역사 기록을 해왔는가를 제대로 보고 그 잘못을 고치고 가야 한다. 중국의 역사와 문화는 제대로 말을 한다면 타이완(臺灣)의 평론가이며 사가(史家)인 백양(柏楊) 씨의 말이 연상된다.
 
그는 한족(漢族)과 중원 나라의 수치스러운 역사는 숨긴다(爲漢中國諱恥)거나 높이고 외국은 깎아내린다(矜炒而陋夷狄)는 그들의 수법을 따르지 않고 중국 4000년의 역사와 문화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국 역사는 정말로 박해(迫害)의 역사이며 중국문화(中國文化)는 인간에 대한 존엄(尊嚴)과 포용력(包容力)이 죄다 결여(缺如)되어 있다라고 말을 하고 있다.
 
일본 역시 역사의 기술(記述)에서 승리는 과장(誇張)하고 패배는 고쳐서 개서(改書)하고, 망명(亡命)은 서술(敍述)하지 않는다는 수법(手法)이 역사를 작성하는 기본 원칙임이다. 일본의 사서인용(史書引用)도 그 전후 배경(背景)과 내용(內容)을 제대로 파악하고 인용해야 한다.
 
중국과 일본은 다 같이 그들의 대륙역사의 치부(恥部)를 숨기기에 도가 너무 지나치는데 이같은 수법을 역사기술의 기본원칙으로 삼아 허장성세를 벌여 온 것들을 본다. 이를 그대로 넘겨서는 안 된다. 그들은 여전히 변함없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을 제대로 알고 대응해야 한다.
 
중국과 일본은 자국의 어린이들에게 자기들이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자기들이 잘못된 침략과 약탈·학살·차별·학대를 반복하며 우리에게 가한 만행을 바로 가르치지 않으며 오히려 미화(美化)하고 자랑스러운 민족인양 허구의 역사를 조작하여 기술하고 있음을 보는데 이런 조작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기만인 것을 숨기며 사실을 거꾸로 기록함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일본이 처음으로 중앙집권체제가 등장한 것은 언제인가를 살펴보면 북부여(北夫餘)의 기마족(騎馬族)이 왜(倭)로 들어온 후의 일이라는 것은 이미 밝혔는데 어찌해서 이 기마족(騎馬族)이 왜(倭)를 쉽게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었는가는 여기에는 말(馬)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은 부여기마족(夫餘騎馬族)이 일본을 정복하고 그들을 지배한 사실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부여 기마족이 왜()를 정복한 것은 철기(鐵騎)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라시아를 정복하게 된 배경에는 철기(鐵器)로 무장한 선진 무기와 기병(騎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어떠한 전투에도 말(馬)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한 것인가!는 고대 우리나라의 구구(舊國)이라는 예맥(銳麥;濊貊)이 1000여년 간이나 대륙을 지배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10세기~20세기에 이르는 1000년 간도 북아시아에 걸쳐서 정복왕조인 거란족의 요(遼)와 몽골족의 원(元), 만주족인 청(淸)이 대륙을 정벌하고 정복해서 지배하며 흥망을 거듭하면서 북아시아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이주문화(移住文化)를 구축하여 중국문화에 자극을 주어 왔던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도 고대 전투에서 말(馬)이 역할은 참으로 놀랄 만한 것이었다. 
 
4세기 모든 면에서 앞서 있는 부여기마족(夫餘騎馬族)은 무기와 기동력의 전광석과 같은 기마병(騎馬兵)으로 적군을 압도하며 대륙의 왜를 정벌하였는데 당시 상대적으로 미개한 원주민들인 왜는 부여기마족(夫餘騎馬族)을 상대할 수 없었기에 쉽게 굴복했다는 것이다.
 
이는 기마병(騎馬兵)이 전투에 위력을 발휘한 역사를 보면, 왜(倭)를 정복한 부여기마족(夫餘騎馬族)이 왜(倭)를 정복한지 1000년이 지난 후 스페인의 피자로가 단 50기(騎)의 기병(騎兵)으로 남미(南美) 폐루의 전설적인 부를 탈취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코르테스는 200명의 기병으로 멕시코를 제압하였던 것과 같이 왜 땅의 비무장 보병들이 부여와 가야의 기마족(騎馬族)을 막기에는 장비나 전략(戰略)적인 측면에서 절대로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당시 왜와 남미와 북미대륙에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정복자에게 손쉽게 함락되는 비극을 맞은 것이다. 여기서 말을 탄 기병이 창칼로 보병인 적을 압도하는데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발을 받치는 등자(鐙子)이었다. 이 등자(鐙子)는 적과 싸울 때 지렛대 역할을 하였다. 
 
등자(鐙子)는 말위에 앉아 쉽게 버티고 일어설 수 있도록 했고 말에 탄 기병이 취하게 된 높이는 적의 머리와 어깨 부분을 내려다보며 공격하는데 유리하여 보병을 압도 할 수 있었다. 
 
서기 220년~265년 간의 중국의 사서 「삼국지(三國志)」와 「위지(魏志)」에 의하면 많은 소부족(小部族)들이 산재해 있었으나 선진 부여-가야 기마족騎馬族)에 대항할만할 강력한 지도자가 없음과 설령 있다고 해도 완전 무장한 기마병을 변변치 않은 무기로는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왜(倭)로서는 부여기마족(夫餘騎馬族)들이 무장을 하고 말을 달려 질주해 오는 광경을 일찍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던 일이었음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 때 왜(倭)는 청동기초기와 철기시대 양식에도 익숙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부여 기마족을 당할 수가 없었다.
 
이 정복으로 부여기마족의 포로가 된 자는 인간 이하의 뜻이라는 ‘하호(下戶)’라고 불렀는데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그들의 포로를 ‘하호(下戶)’라고 불렀다. 이것은 고대의 ‘하호(下戶)’를 지금까지도 왜(倭) 당시 불렀던 것을 그대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보듯이 왜는 기병을 앞세운 부여-가야족에게 정복되어 이들에 의해서 새 나라를 세워 갔던 것이다.   
 
부여-가야족이 세운 야마토 조정은 대륙에서 시작했다
 
야마토(大和) 국가의 성립은 부여-가야 기마족을 중심으로 야마토의 호족의 연합정권인 조정이 성립하고 선진문화 섭취를 시작으로 소국가(小國家)에서 국가다운 야마토(大和)나라가 나왔다. 이 야마토(大和)이전의 왜(倭)는 한(韓)의 비미국(卑彌國)과 구노국(狗奴國)의 발전한 국가이다.
 
일본의 역사서를 보면 한결 같이 고대부터 일본열도에서 국가가 성립한 것 같이 꾸미고 있으나 이는 양자강 이남의 역사와 670년 일본이이라는 국호가 대만에서 시작한 것을 숨기는 것이다. 
 
현재까지 일반적인 도서(圖書)에서는 타이완(臺灣)‘1600년 이전은 모른다고 한 것도 있고 ()나라 때부터 알고 있다고 하였으나 북경대학의 자료집에 의하면 타이완=대만(臺灣)은 이(夷洲)라 명기(銘記)하고 있는데 이주(夷洲)는 후한서(後漢書)에 이주(夷洲)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열도에서 이주(夷洲)를 다스린 것이 아니라 왜(倭)가 양자강 이남에 있으면서 타이완을 다스렸다는 것이다. 왜(倭)가 당(唐)과 사로신라(斯盧新羅)에 의해서 본거지에서 축출되며 이주(夷洲)에서 일본을 재건하고, 본국 탈환을 꿈꾸며 옛 영토를 탈환을 시도 하였으나 장보고(張保皐)의 봉쇄를 받으면서 일본을 건국한 왜인(倭人)들은 국력을 키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1279년 원(元)나라 정벌 때부터 명(明)나라 때까지 본토 회복을 반복 시도하며 사로신라(斯盧新羅)·원(元)·명(明)의 동해안에 출몰하기도 하고 고리(高麗) 땅에도 침범하기도 하였으나 본거지를 잃어버리고 류구열도(琉球列島)를 거쳐 일본열도(日本列島)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중앙정부가 없던 일본열도(日本列島)로 완전히 이주(移住)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대만은 네덜란드가 1624년 남서안에 침입하여 안평(대남)에Zeelandia(젤렌디아스)성을 구축하고 적차(赤짜;대남시)에 프로바덴시아 성을, 북부 기륭에 트리니다드 성과 산토도밍고성을 구축하고 있던 스페인에 대하여 공격하여 1642년 네덜란드 통치가 시작되었으며 명(明)나라 유신(儒臣) 정성공이 1661년 건너와 대륙 회복을 꿈꾸었으나 1662년 사망하고 3대,32년 만에 청(淸)나라에 굴복한 것이 일본(日本)이었던 타이완(臺灣)의 지나온 역사이다. 
 
이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양자강 이남의 왜(倭) 역사와 이를 이은 670년의 일본역사가 제대로 기록하지 않아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식민역사로 잘못 인식되어 타이완(臺灣)역사가 1600년 이전은 없었던 것처럼 비치게 되었다. 이는 발해(渤海)의 역사처럼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미 기술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에서 Zipangu(지판구)라고 소개된 부분이 바로 타이완(臺灣)에 있던 일본에 대한 기록으로 봐야 한다. 이것은 왜인(倭人)들의 역사이지, 일본열도(日本列島)의 역사가 아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타이완(臺灣)의 역사를 숨기고 있다. (以上은 吳在成, 九犂系, 倭-日本史’. 17~42面 參照하고 본문(本文)引用 하였음을 밝힙니다.) 
 
일본열도는 동이전의 왜() 존재지역 아니다
 
지금 왜곡된 일본사(日本史)를 가지고 일본이 처음부터 일본열도(日本列島)에 있었던 것처럼 말하나 왜(倭)는 일본열도(日本列島)이전, 양자강 이남에 있었음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중국25사(史)」 동이전(東夷傳)에 있는 왜(倭;위(衛)는 일본열도(日本列島)와는 무관(無關)한 나라이다.
 
또 사로신라(斯盧新羅;동신라), 가라(加羅;가야(伽倻)도 한반도와는 무관하며 대륙의 왜(倭)와 인접한 나라인 것을 제대로 알고 말을 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한조(韓朝)와 일본열도(日本列島)를 중심으로 기록 한 것이 아니라 산서성(山西省)의 요(遼)를 중심으로 동서를 가르는 「중국25사」 동이전과 「삼국사기」의 공통부분을 기록한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720년 안만려(安萬呂)가 히에다노 아례(稗田阿禮)가 송습(誦習)한 전승(傳承)을 찬록(撰錄)한 「일본서기(日本書紀)」도 일본열도(日本列島)에서 기록한 것이라는 것이 어려운 것은 지진과 홍수가 많은 자연조건을 가진 일본열도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기에 어려운 만큼 자연현상이 기록되지 않았으며 「일본서기」의 일식기록의 집중 관측(觀測地)는 양자강 이남이라는 점이다. 
 
이러함에도 일본은 동이전 왜(倭)의 기록을 일본열도의 기록으로 보려고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25사(史) 동이전(東夷傳)을 아시아 전 지역에 대입(代入)하였을 때 양자강 이남으로 확인되었다. 이래도 일본열도라 한다면 이는 정상이 아니다. 왜는 양자강 이남에 있었음을 숨길 수 없다. 
 
일본열도는 백제가 660년 망하고 백제유민이 왜(倭)로 가서 왜(倭)가 670년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당(唐)으로부터 승인 받은 후 쓰기 시작한 후, 명(明)이 1403년에 일본열도(日本列島)에서 쓰도록 한 역사를 바로 알 필요가 있다. 이는 현재 중화민국 타이완(臺灣)과 같은 상황과 같이 되어, 본토회복(本土回復)을 못하고 새로이 진출한 새 개척지(開拓地)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학계는 25사(史) 동이전(東夷傳)의 왜(倭)의 위치를 일본열도에 두려고 동 이전 전체 역사를 흐려놓고 있다. 동이전(東夷傳)의 동이위치(東夷位置)는 요(遼)의 동쪽을 중심으로 요(遼)의 서쪽 진출(進出)로 인한 장안세력(長安勢力)과 분쟁(紛爭)의 기록들인 것이다.
 
왜(倭)로 진출하기 전 왜인(倭人)들은 본토회복을 위하여 처절한 노력의 일환으로 대륙 동해안과 우리나라 해변으로 침투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일본 열도로 진출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열도(日本列島)로 진출한 왜인들의 후예는 동일본(東日本)을 건국하였다. 여기에는 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진출한 낙랑국인(樂浪國人)과 고구려인·신라인·백제인(百濟人)이 진출했던 가야인(伽倻人)들의 후예가 후발(後發)로 진출하여 왜인(倭寇)들과 함께 동일본(東日本)을 건국한 것으로 보여 진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에서 기록된 1279년 원(元) 원정(遠征) 이후 왜구(倭寇)의 활동이 극대화 하였는데 명(明)나라 동해안과 고리(高麗) 해안을 넘나들었으나 본토회복을 하지 못하고 본거지인타이완(臺灣)도 네덜란드에 평정(平定)되는 바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 이전의 활동무대는 새로운 개척지를 필요하게 되었고 대마도와 구주(九州)를 접수하고 일본열도를 개척하여 동일본을 통합하게 되었다. 그들은 일본열도에서 성(城)을 구축하고 해자(垓字)를 만드는 등 대륙에서 사용되는 방어법을 적용하여 일본열도 통일국가로 만들었다.(以上은  吳在成, 九犂系, 倭-日本史’.42~43面을 參照本文을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타이완의 일본과 일본열도의 본은 위치가 다르다
  
양자강 이남의 대륙의 왜(倭)는 670년 국호(國號)를 일본(日本)으로 변경하였는데 동일본(東日本)은 일본열도(日本列島)에서 1403년 명나라로부터 국호를 받은 일본열도의 나라를 이르는 말이다. 우리는 일본이라 하면 일본열도의 일본만을 생각하는데 이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
 
대륙에서의 일본은 왜(倭)가 타이완(臺灣)으로 밀려가서 타이완(臺灣)에서 670년 당(唐)의 승인으로 탄생한 일본이고, 일본열도의 일본은 명(明)의 승인으로 15세기 초(1403년)부터 불리게 된 것은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3代將軍)인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의 공(功)이 컸다.
 
그는 1333년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가 멸망 후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때 남북조 내란 때 내란을 평정한 그는 전제권력(專制權力)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그래서 막부(幕府)정치체제를 확립하고, 대명무역(對明貿易)에 있어서 자신이 [일본국왕]이라는 명칭을 쓰면서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로 무역거래하며 명(明)과의 우호(友好)를 돈독히 하며 얻은 국호(國號)이었다.
 
그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실력자로서 금각(金閣)을 세우고, 당시 발전한 명(明)과의 무역을 시작하여 막부(幕府)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인물이었다.  
 
그는 교토(京都)의 무로마치(室町)에 꽃의 어소(御所)라 불리우는 크고 화려한 저택을 짓고 무가정치(武家政治)를 행했다. 거기서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의 막부(幕府)를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라 불리게 되리만큼 당시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대륙과 일본열도의 일본은 시대가 다르고 위치가 다르다는 것이다. 대륙의 일본은 670년 이전의 왜(倭=衛; 와)는 양자강 이남에 있었기 때문에 중원(中原)세력에 의하여 중원으로부터 축출되어 이주(夷洲)인 타이완(臺灣)으로 이주하며 일본이라는 국호를 당(唐)의 승인으로 사용하기 시작하고 1403년 일본열도국호(國號)는 명(明)이 승인 국호이나 그 위치가 다른 것이다.
 
왜(倭)가 국호를 670년에 왜국(倭國)에서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 한 것은 정권의 변혁으로 볼 수 있으나 왜가 망하고 이주(夷洲)이었던 대만(臺灣)으로 쫓겨난 후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대만에 있던 일본이 언제 패망하였는지 분명한 자료가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대만역사를 16세기 이전은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왜(倭)의 이주(夷洲)였음으로, 왜가 패망하고 이곳으로 패주(敗走)하여 일본을 건국하였는데 그 일본이 패망한 것을 추증(推證)하는 것은 바로 마르코 폴로 여행기에 Zipangu(지판구)라고 나오는 부분이 타이완(臺灣)의 일본(日本)이 패망(敗亡)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송()나라 때 발행한 송본지리지장도(宋本地理地藏圖)에서 대만은 그리지 못했다. 그런데 원()나라에서 배를 띄워 쳐들어갔다면 가장 가깝고 큰 지역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송()나라 지도에도 등장하지 못했던 육지(중국)에서 제일 가깝고 큰 섬은 타이완(臺灣)밖에 없다. 이곳이 일본(日本)이었으며 서양에서 말하는 Zipangu(지판구)라고 볼 수밖에 없다.
  
글을 맺으며
 
왜이주(倭夷洲)였던 타이완(臺灣)의 일본이 1279년 원()의 침입으로 그 땅마저 잃었다. 그 잃어버린 본토를 회복하려고 군대를 일으켜서 명()나라 동해안으로 진출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조선의 해안으로 침범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여 그 무리가 개척지 일본열도(日本列島)로 가서 신일본(新日本)을 건설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을 받는 것은 왜구가 과연 해적이었나? 이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 원()나라판구(Zipangu)를 평정한 것이 1279년인데 이 곳이 타이완(臺灣)에 있었던 일본인 것이다.
 
그런데 일본열도의 평정은 1281년이다. 왜가 대륙에서 쫓겨나 타이완(臺灣)으로 가서 국호를 일본(日本)이라고 하고 본토회복을 준비하여 왔는데 그 일환으로 왜인(倭人)들이 대륙으로 진출한 것을 왜구(倭寇)침입이라 하나 이들은 본토 회복을 위한 백제인 연합군대로 보고 있다.
 
()과 명()뿐 아니라 고리와 한조선(韓朝鮮)도 침입하였는데 그 규모가 100500척이아면 이는 해적집단이 아니라 원나라의 평정에 대항하고 당()과 원()으로부터 본토회복을 위한 전쟁의 한 방편이었다고 우리역사연구원원장이신 오재성(吳在成) 선생은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6.25까지 합치면 외침을 932회나 받았다. 그 중 이 왜구가 가장 많은 침입을 해왔다. 그 중 왜구의 침입은 1223~126513세기의 왜구는 우리나라를 병참기지로 했을 정도였고 1350~1391년 경인년(庚寅年) 이후의 왜구는 40년 동안 591회나 침략기록이 있었다.
 
그리고 1392~1555년의 조선시대의 왜구는 울릉도 주민을 이주시키고 있을 정도로 극성이었다. 그래도 본토 회복을 못하니 명과 고리(高麗)와 조선(朝鮮)을 침범하였으나 이곳에도 정착되지 못함에 일본열도(日本列島)로 가서 신 개척(開拓)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당시 특히 1350년대부터 1400년도까지 왜구(倭寇)는 대륙의 동해안(東海岸)과 고려(高麗), 조선(朝鮮)을 침입했으나 끝내 침입이 실패함으로 일본열도(日本列島)로 간 것으로 보고 있다. (以上吳在成, 九犂系, -日本史’.21~50, 參照하고 本文引用 하였음을 밝힙니다.).
 
우리나라는 매국식민사관자(賣國植民史觀者)들에 의해서 역사가 뒤엎어져 있어서 우리 국민도 역사에 그리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는 참으로 비극적인 상황이라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인 로버트 하인라인은 역사를 무시하는 세대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역사가 뒤엎어진 것을 모르고들 있다. 이제는 자랑스러운 우리역사 바로세우고 천손민족(天孫民族)의 자랑스러운 자손답게 긍지와 자부심 갖고 살 수 있게 우리 손으로역사를 바로 찾고 가야 한다. 역사를 잃으면 다 잃는다. 각성과 결단과 실천이 요구되고 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東夷歷史 ’. (右犂)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九犂系, 新羅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日本史’. 吳在成 編著, ‘지도로 보는 우리나라역사(東夷疆域圖)’.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國會 文公分科委員會, 國史敎科書內容要求請願-[國史公聽會 陳述人 發言內容].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김동락, ‘천부경과 문디거시기’. 황순종,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이종호, ‘한국인의 뿌리’. 박영규, ‘고려왕조실록’.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李丙燾, ‘譯註 三國遺事’. 이강민,‘대한국고대사’.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李進熙’ ‘好太王碑’.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민족과 홍익인간세상’. 카터 코벨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歷史’. 石井進外3,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延長-, ‘古代日本史’. 秋山謙藏, ‘日本歷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べる日本史’. 槐一男, 永原慶二 監修, ‘絶對 中學社會歷史’. 杉山徹宗, ‘眞實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歷史. , . 李民樹,'朝鮮傳‘.外 其他多數書冊參照, 本文引用 함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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