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지나(支那)는 자기들은 왜곡되고 조작된 역사를 가지고 고대부터 다른 민족을 지배한 것 같이 변조하였으나 그들의 이미지는 거의가 사마천의 [사기(史記)], [삼국지(三國志)], [십팔사(十八史)]등 고대 역사서(歷史書)나 [논어(論語)].를 위시해서 [사서오경(四書五經)], 두보(杜甫)와 이백(李白)을 대표로 하는 한시(漢詩), [서유기(西遊記)], [수호전(水滸傳)]등의 소설(小說)등, 이러한 것으로 그 형태를 세련되게 잘 표현해서 중국의 이미지를 굳히고 있는 사정을 본다.
일상적으로 ‘한자(漢字)’도 모든 문물제도(文物制度)가 우리가 만든 것을 지나(支那)의 것이라 하나 지나(支那)의 것은 우리가 만든 전체에서 볼 때 적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認識)해야 한다. 지나(支那)의 역사는 거의가 다 왜곡 변조되어 역사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역사와 철학과사상, 종교 문화예술, 문물제도 등 우리의 것을 가지고 자기들의 것인 양 너무 미화(美化)하고 제멋대로 만든 허망(虛妄)의 지나상(支那像)을 실상(實像)과 허상(虛像)을 잘못 알고 잘못 보는데서 우리의 실상(實像)을 잘못되게 하고 있음에서다.
필자는 지나(支那)와 일본의 역사를 연구하며 왕조(王朝)교체 때마다 수천만의 단위로 반복 되었는가?를 생각해 봤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중국은 주변 이민족(異民族)에 대한 침략과 말살(抹殺)이 반복되는 대학살의 참으로 전율(戰慄)의 역사가 중국4천년역사라는데 동감(同感)하게 된다.
지나(支那) 4천여 년의 역사에 있어서 얼마나 침략(侵略), 지배(支配), 약탈(掠奪), 학살(虐殺), 말살(抹殺), 차별(差別), 학대(虐待)를 반복하여왔는가! 바로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지나(支那)는 자국(自國)어린이에게 이런 것을 결코 가르치지는 않는다. 즉 가해자로서의 반성이 어디에도 없다.
우리역사는 12000년 역사에서 이렇게 다른 민족을 대량으로 학살(虐殺)한다든가, 생매장(生埋葬)한다든가, 또는 노예(奴隸)로서 매매(賣買)한다는 것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支那)의 경우는 대집단(大集團)의 민족도 무수히 전멸(全滅)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와 다르다.
때문에 타이완(臺灣)의 유명한 평론가인 백양씨(柏楊氏)는 중국 4천년 역사에 관해서 [중국사(中國史)는 사실그대로 박해(迫害)의 역사이며, 중국문화(中國文化)는 인간에 대한 존엄(尊嚴)과 포용력(包容力)이 전혀 결여(缺如)되어 있다.] 고 분석(分析)하고 있을 정도이다.
오늘은 지나(支那)의 지난 4천여 역사에서 한민족(漢民族)이라는 민족이 우리에게서 문물제도와 정치 등 모든 것을 우리에게서 배운 것을 아는 것이 지나 역사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리라 보는데서 지나의 역사, 문물제도 등 그 실상(實像)은 과연 어떠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요(堯), 순(舜), 은(殷), 주(周) 지나(支那史) 맞는가?
중국은 서기전 1600년~서기전 221년 은주(殷周)시대라 하는데 이 시대를 중국최고(最古)의 왕조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그것은 고인류학(古人類學)으로나 고고학적(考古學的)으로 조사를 해봐도 아니기에 이 이론은 지금 중국 삼황오제의 시기와도 안 맞는 허구역사다.
이 삼황(三皇)은 상고, 배달국시대의 왕조(王朝)를 다스린 황제인데 지나의 4천여 년 역사보다 천년이상 앞서 있는 왕조로 연대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 지금 지나는 대륙에 있었던 왕조다.
이 역사를 자기들 역사라 하며 조작하여 이를 뒤엎고 있다. 이 차제에 역사를 바로해야 한다.
은(殷)과 주(周)왕조는 중국 최고의 왕조가 아니다. 이 시대대륙은 우리 동이족이 지배한 것임을 이미 밝혔다. 역사는 과학적으로 다뤄야 한다. 역사를 존중하는 목적이 그 민족의 정체성(正體性)을 바로 하고 그 민족의 활로(活路)를 개척하는데 있는데 우리역사는 뒤엎어져 있다.
고대 우리민족이 천제(天帝), 황제(皇帝)의 국가로 등장한 것은 오늘날 고고학에 의하여 확실히 판명되었다. 그런데 문서역사에는 도리어 우리가 천제(天帝), 황제(皇帝)의 국가에 예속된 후왕의 국가로 위조되어 있다. 즉 자주독립의 민족사관의 패배속의 식민사관으로 변모되었다.
예컨대 은(殷)은 서기전 1600년 경 부족국가의 연합체로서 화북일대(華北一帶)를 지배한 김유신(金庾信)의 선조(先祖)가 세운 나라로 이 당시 중원은 우리 동이족이 지배하고 있었던 시대이다. 이 은(殷)도 당연히 우리역사에 포함되는 것이 옳은 것이나 중국에 역사로 나와 있다.
원래 이곳은 상고시대부터 우리가 먼저 선주(先住)해서 정벌하고 정복하여 지배해온 우리의 영역이었음을 부정 할 수 없다. 사서(史書)에 의하면 은(殷)의 시조인 ‘계(契)’는 전설의 왕조인 하(夏)의 우왕(禹王)에 의한 황하(黃河)의 치수(治水)사업을 도운 공적(功績)에 의해 제순(帝舜)시대에 하남(河南), [상(商)]의 땅에 봉(封)해졌다고 말해지고 있다.
은(殷)이라는 국호(國號)도 상왕조(商王朝)의 유렵지(遊獵地)로부터 취한 것이라 말해지고 있다. 국호(國號), 상(商)이라는 자(字)는 회임(懷妊)의 즐거움과 부족(部族)발전을 축수(祝壽)하는 의미가 있다고 말해지고 있다. 이 은(殷)은 동이족으로 우리와 무관(無關)한 것이 아니다,
또한 지나가 자기민족으로 지나문화(支那文化)를 창설한자는 요(堯), 순(舜)이라 하는데 실제로
지나문화(支那文化)를 창설한 자는 요(堯)가 아니라 순(舜)이다. 이 순(舜)임금도 우리와 같은 동이(東夷)의 사람이다. 맹자(孟子)의 ‘이루장(離婁章)’에 ‘은(殷)은 동이(東夷)의 인(人)이라 말하고 또 순(舜)은 동이인(東夷人)이라 하였다. (史記卷一, 오제(五帝本第一 (註, 周處풍風土記),
이는 지나사학계(中國史學界)의 제일인자(第一人者)라고 하는 사마온공(司馬溫公)과 지나문화의 대종사(大宗師)인 공자(孔子)의 견해에서 나타나고 있다. 즉, 사마온공(司馬溫公)은 계고록(稽古錄)에서 요(堯)에 대하여 도당씨(陶唐氏)라 간단히 언급하고 순(舜)에 대하여는 유유씨(有虞氏 上下)에 양편(兩篇)에서 자세히 언급하였는데 ‘순(舜)은 대 성인(聖人)’이라 하였다.
은(殷)의 신화(神話)가 ‘난생설(卵生說)’로서 우리와 동일하고 은인(殷人)이 백의(白衣)를 입는 것이 같다. 지나의 사가(史家) 임혜상(林惠祥)과 지나의 문인(文人) 전사년(傳斯年)도 은인(殷人)동이설(東夷說)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에 공자가 은인(殷人)이라 자칭하고 사기(史記)에도 공자가 은인(殷人)이라 기록하였다.(史記卷四十七 孔子世家 第十七).
위와 같이 고대 지나의 왕조(王朝)와 왕도 우리 한민족(韓民族)이요, 지나문화를 개척한 자가 한민족(韓民族)인 순(舜)이요, 지나문화의 총본산(總本山)인 유교(儒敎)를 창설한 공자(孔子)가 우리한민족(韓民族)이다. 유교가 한민족(韓民族)에 의해 창조된 사실은 유교(儒敎)도 우리의 사상(思想)을 계승한 것이라 추정(推定) 할 수 있고 지나의 고대국가들도 우리와 무관치 않다.
지나(支那)의 문화, 문물제도 모두 조선서 발생
우리는 오랫동안 지나의 성리학에 취해 지나를 상국으로 받드는 조선시대의 타성(惰性)이 있어서인지 우리나라가 적고 보잘 것 없는 역사로 보는 사람을 가끔 보는데 우리는 너무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으로 인류사상 최초에 등장한 문화민족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예컨대 먼저 종교적인 것을 볼 때, 유교(儒敎)는 우리의 사상을 계승한 긍정적인 실증(實證)이 있는데 유교(儒敎)의 주지(主旨)는 인(仁)으로 이는 우리의 인간사상(人間思想)을 계승하였다. 논어(論語)에 인자낙산, 인자수(仁者樂山, 仁者壽)라 하였다. (論語 卷六, 雍也第六).
즉, 인자(仁者)는 산을 즐기고 인자(仁者)는 장수한다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자(朱子)는 인자(仁者)는 부동(不動)하여 산같이 부동(不動)함으로 산을 즐기고 인자(仁者)는 유상(有常), 안정(安靜)함으로 장수(長壽)한다고 해석 하였다. 이는 그릇된 해석이다.
인(仁)과 의(義)는 다르다. 맹자(孟子)에 측은(惻隱)한 마음을 인(仁)이라 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의(義)라 구별하였다.(孟子 公孫丑章句上). 또한 ‘삼동계(參同契)’에 인(仁)은 덕을 설(設)하고 의(義)는 형설(刑設)한다고 구별하였다.(參同契, 君子居其室). 第十六章). 그럼으로 인(仁)과 의(義)가 다르다.
우리나라 인간사상(人間思想)의 모체인 신선사상(神仙思想)이 본질이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장수(長壽)를 탐구하는 것을 본 공자가 우리의 인자(仁者) 즉 인간주의자(人間主義者)가 장수(長壽)의 술(術)을 탐구하는 것을 본 공자(孔子)가 인자(仁者)가 장수(長壽)한다고 한 것이다.
주자(朱子)는 소위 대지나사상(大支那思想)에 편향(偏向)하여 지나를 높이고 우리나라를 하시(下視)하였다. 이런 것은 고문(古文)을 해석하는데 우리나라는 말살하기 위하여 무리한 해석을 하는 악습(惡習)이 있다. 지금까지 지나와 일본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하며 실물 나게 봐 왔다.
그런데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가 ‘공자는 요순(堯舜)의 사상을 계승하였다’고 하였다.(中庸 右第三十章 言天道也). 그런데 위에서 본바와 같이 실제로 중국문화를 개척한 자는 요(堯)가 아니고 동이족인 순(舜)이다. 또한 공자(孔子)가 창조한 유교도 한국인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이는 지나의 학자들도 입증하고 있다. 특히 허신(許愼), 서연경(舒連景)등 지나학자는 ‘동이(東夷)는 대인이다.’ ‘동이의 풍속은 인(仁)하다.’ ‘인(仁)한 동이(東夷)가 수(壽)함으로 군자불사(君子不死)의 나라라 칭한다.’고 하였다. 유교의 주지는 인(仁)이요, 행동강령은 충효로 요약된다.
공자(孔子)가 중국에서 그 사상을 보급시킬 수 없음을 개탄하고 조선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한 것은 이유가 있다고 한 것이다. 이는 공자가 우리의 인(仁)을 숭배한 것이다. 즉 유교의 주지(主旨)는 인(仁)이요, 그 인(仁)은 분명히 우리의 인간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유교는 또한 우리의 인간사상을 계승하여 창조한 것으로 보고 있다. (以上은 崔仁, ‘韓國學講義’35~47面 參照)
지나(支那)의 문물제도 우리에게서 배웠다
지나은 모든 제도가 자기들이 만들었다고 말을 하나 아니다. 고대부터 우리의 문물제도를 배운 것을 숨길 수 없다. 이에 대하여는 이미 오래전 다뤘다. 요새 잘못된 식민사관자들이 가르친 역사만을 아는 자들이 무지한 말을 주변서 들으며 다시 말하게 된다.
지나의 모든 문물은 우리에게서 황제제도며 군사와 만 가지 문물제도가 우리에게서 배웠다. 그 실예(實例)를 들면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소공(昭公)17년 추(秋)에 담자(郯子)가 내조(來朝)하니 소공(昭公)이 소호씨(少皥氏)가 관직(官職)에 조명(鳥名)을 부친 유래를 물었다고 했다.
이에 담자(郯子)가 내 할아버지 소호씨(少皥氏)가 즉위하니 봉황(鳳凰)이 나타났다. 이로 인(因)하여 관직에 조명(鳥名)을 부치었다고 해설하였다. 이 말을 들은 공자(孔子)가 28세의 청년으로서 담자(郯子)를 방견(訪見)하여 천자(天子)의 관제(官制)를 배우고 옛날부터 관제(官制)를 잃으면 사이(四夷)에게서 배운다는 말이 있었는데 과연 그러하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천자(天子)의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창조한 이 제도를 지나(支那)가 수입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봉황(鳳凰)은 천자(天子)에 전용(專用)하는 문구(文句)이다. 지금 지나는 이것도 자기들 제도라 하나 우리에게서 배워 익힌 것이다. 제대로 알아야 한다.
천자(天子)에 관해 보면 좌석을 봉탑(鳳榻)이라하고 천자(天子)의 궁전(宮殿)을 봉지(鳳墀)라 칭하며 천자(天子)의 서(書)를 봉조(鳳詔)라 칭한다. 이에 소호씨(少皥氏)가 봉황을 보고 관명(官名)을 지었다함은 천자(天子)의 문물제도를 설정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고대지나인이 봉황은 조선에서 출생하였다 하였다. 이는 천자(天子)의 문물제도가 조선에서 창조된 것을 의미한다.
고대 사방민족 중 우리민족이 대표적이었다. 때문에 우리민족을 사이(四夷)라 칭한 예가 많이 있다. 삼국지(三國志)에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를 사이(四夷)라 칭하였다. 공자가 옛날부터 사이(四夷)에서 천자(天子)의 관제를 배웠다고 말한 것은 우리에게서 배웠다고 한 것이다.
즉, 지나에서 저명한 사가(史家)라고 말해지는 범엽(范曄)이 위의 공자의 말을 후한서 동이전에 기입하고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도 위의 공자의 말을 기입했다. 이는 공자(孔子)를 가르친 담자(郯子)가 우리민족이요 공자가 말한 사이(四夷)가 우리한민족인 것을 입증한 것이다.
지나는 천자(天子)의 고대부터 우리가 창조한 문물제도를 수입한 것을 숨길 수 없다. 한나라 채옹(蔡邕)이 저술한 ‘독단(獨斷)(권상(卷上)’에 ‘천자(天子) 라는 칭호는 이적(夷狄)이 창조한 것이다. 이적(夷狄)은 천신(天神), 지신(地神)의 피를 받은 민족으로 자처함으로 천자(天子)라는 칭호를 창조하였다고 한 것이다. 중국에는 천신의 피를 받았다는 천민사상(天民思想)이 없다.
논어(論語)에 ‘(夷狄之有君如諸夏之無也)’라 하였다. 즉, 이적(夷狄)은 군주(君主)가 있고 지나는 군주가 없다. 그럼으로 이적(夷狄)의 풍속(風俗)과 지나의 풍속은 같지 아니하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지나에 군주가 없다고 한 것은 무엇인가? 이는 군주제도가 없음을 가리킨 것이다.
즉, 이적(夷狄)은 군주(君主)를 섬기는 문물제도(文物制度)가 있으나 지나(支那)는 군주(君主)를 섬기는 문물제도가 없음을 개탄(慨嘆)한 것이다. 여기 이적(夷狄)은 우리민족을 가리킨 것이다.
중, 일은 우리의 선진문물 이어받은 나라다
필자는 지나와 일본의 사서를 보면서 어찌 이리 역사를 왜곡하며 조작 변조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동양의 3국의 국민은 다 같은 조상을 가진 형제와도 같은데 역사열등의식이 빚어놓는 왜곡이 피아간 모든 국민에게 하나도 이롭지 않음을 왜 모르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채옹(蔡邕)과 같이 솔직히 최초에 천자(天子)의 문물제도를 창조하고 지나는 우리한민족이 창조한 문물제도를 수입하였다고 고백한 것이 역사를 바로 하는데서 참으로 더 감명 깊다. 이런 글은 지나(支那)역사가 폄하되는 것 아니다. 물이 높은데서 얕은 대로 흐르는 것은 순리이다.
지나(支那의 고서(古書) 산해경(山海經)-(해내경(海內經)에 조선천독(朝鮮天毒)이라 하고 석문(釋文)에 독(毒)은 육(育)이라 해석하였다. 이것은 천(天)이 양육(養育)한다는 뜻이다. 즉, 조선민족은 천신(天神)의 양육을 받는 자손이라 가리킨 것이다. 말을 바꾸면 천자(天子)라는 명칭이 우리 한민족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포박자(抱朴子)에 지나(支那)민족이 시조(始祖)라 칭하는 신화적(神話的) 제왕(帝王)인 황제(黃帝)가 동으로 청구(靑丘)에 와서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얻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청구(靑丘)는 조선이요 삼황(三皇)은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을 가리킨 것이다.
지나(支那)역사에 천황씨(天皇氏), 지황씨(地皇氏), 인황씨(人皇氏)라 기록한 것은 조선에서 수입한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백긴 것이다. 이 신화(神話)도 천자(天子), 천황(天皇), 황제(黃帝)의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최초에 창조한 자가 우리한민족이요, 지나(支那)는 우리가 창조한 문물제도를 수입한 것이라 가리킨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지나인의 모든 문헌(文獻)은 천자(天子)의 문물제도를 창조한 자가 우리한민족이라는 주장을 충분히 입증(立證)한다. 이는 우리의 문물제도는 지나와 일본에 수출된 것이다.
고기(古記)에 천신(天神)환인(桓因)이 조선 땅을 중심으로 인류를 지도(指導)한다고 단군이 천신(天神)의 피를 받았다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대사가(事大史家)들은 이를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천신(天神)의 피를 받은 천손이다. 이는 우리머리와 발가락에도 나타나 있다.
주역철학(周易哲學)과 천도(天道)라 칭하는 홍범구주(洪範疇)도 조선에서 창조된 것이다. 은(殷)은 동이족으로 은(殷)의 시조(始祖)는 성탕(成湯)인데 그의 16세손(世孫)이 기자(箕子)이다.
서전(書傳) 홍범장(洪範章)에 기자(箕子)가 주무왕(周武王)에게 홍범구주(洪範疇)를 전도하였다고 하였다. 홍범구주(洪範疇)가 동이(東夷)에 의하여 지나(支那)에 전한 것은 그 홍범구주(洪範疇)가 동이족에 의해서 창조된 것을 실증하는 것이다.
인류사상 우리가 철활자(鐵活字)를 만든 것은 천하가 다 공인하고 있는데 고대 지나인이 2천년 동안 우리의 고시(楛矢) 석족(石鏃)을 수입하고 당태종이 신라의 천궁(天弓)을 배우려고 애원한 사실 등을 고찰하면 지나의 문화사상뿐만 아니라 물질문명도 우리에게서 수입한 것이다.
글을 맺으며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지나는 문화사상 및 물질문명 양면에서 우리에게서 배웠다. 이를 지나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북사(北史; 卷九十四 末尾)에 ‘동이에게서 수입한 것은 궁시(弓矢)뿐만 아니라 기타도 수입한다고 기록 하고 있고 또한 주역(周易)에 [帝出乎震.....萬物出乎震 東方也)라 하였다. 즉, 지나문화의 중핵(中核)인 황제제도가 동방 조선에서 창조 되었다고 했다.
만(萬)가지 문물제도가 다 동방에서 창조되었다고 한 것이다. 지나문헌에 이상과 같이 문화사상, 물질문명에 대하여 중국은 조선을 배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함에도 식민사관자들은 중국일본의 사서에 왜곡되고 변조된 문헌을 참고로 아직도 우리역사가 반도역사로 보고 있다.
우리역사를 망가트리며 외국학자들에게서조차 조롱을 받고 있는데 이를 모르는 그들은 5%도 아니 되는 한반도에서의 역사를 전체 우리역사인양 포장하며 정신을 잃고 있다.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고 보면 우리역사는 대륙역사인데 이를 제대로 연구하고 말을 하기를 바라진다.
얼마 전에 KBS에서 사학 관계 서류를 모아서 연변대학에 기증을 했는데 연변대학 총장이 그걸 읽고 난후 무슨 이런 책을 보냈느냐, 하면서 모조리 폐기 처분 했다는 글을 읽었다. 광복 후 지금까지도 식민사학을 복창한데 나라망신 시켰다고 했다. 아직도 사대주의 멍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나라망신을 시키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우리역사는 반도 역사도 아니고 대륙사다.
후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