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는 대륙 안휘성(安徽省) 지역에 있었다

입력 2019-09-01 12:4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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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교수
우리 역사는 유라시아역사지 반도의 역사가 아니다. 하지만 왜곡된 역사에 길들여진 우리나라 사람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다. 우리 역사를 반도역사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로, 우리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환국과 배달국시대부터 유라시아를 지배하고 삼국시대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왜(倭)가 대륙에서 건국되고 대륙에서 생성 발전한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제 아무리 아니라하며 반도역사로 꽤 맞추려 해도, 21세기에 와선 이를 고집할 수 없다.
 
부여와 고구려가 대륙 북방에 있고 백제가 북경근처에 있었으며 가라(加羅)와 신라가 안휘성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을 거짓이라 하지 못한다. 이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300년 전 쓰여 진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와 ‘삼국사기’나 ‘남제서’도 중원도 우리 동이족이 주인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중국은 청(淸)나라를 역사의 원류(源流)로 삼고 있으며 금(金)나라는 신라의 김알지(金閼智)를 조상으로 알고 있다. 즉 금(金)나라는 아골타가 신라의 후손이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원(元)나라와 중동의 카자흐스탄을 비롯해, 이란도 투르크족을 기반으로 해서 건국한 것을 숨길 수 없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우리 역사가 한반도의 역사라는 것이다. 우리 역사는 유라시아역사지 반도의 역사가 아니다. 이는 세계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역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역사논쟁만을 하며 생계유지를 위해 지금도 중국과 일본의 노예가 되고 있는 강단학파들은 우리 역사를 반도에 가두고 있다.
 
삼국시대 반도의 신라는 고구려의 마립간(麻立干)이 다스렸는데 이는 고구려의 제후국(諸侯國)에 지나지 않는 간(干)이 다스린 것이다. 이는 이미 다뤄서 아는 바, 신라는 대륙에 사로신라(斯盧新羅)가 있었고, 가라(加羅);가야(伽倻)도 왜(倭)도 대륙에 있었음은 다 밝혀졌다. 또한 양자강 이남에 있었던 왜(倭)가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후예인 것도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일이다.
 
지금 우리나라 역사교육은 아직도 왜곡된 역사의 너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문제다. 아직도 살수가 청천강이고 고구려가 망할 때, 수도가 북의 평양이라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도대체 역사를 어떻게 연구했기에 이런 허구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지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한반도에 있지도 않은 살수대첩이나, 강감찬의 구주대첩을 말하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너무나 황당함을 금할 수 없다. 살수는 황하가 살수고 구주는 만주에 있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반도 안에 집어넣어서 하는 자들은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은 자들이다.
 
삼국시대 전쟁은 거의 모두가 반도 밖의 대륙에서 이루어졌다. 반도에서 전쟁을 했다는 자는 역사를 연구를 하지 않은 자이다. 또한 대륙을 정벌하고 정복하며 대륙을 지배한 흉노족은 중국의 4배나 되는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대 실크로드를 장악한 것이 바로 우리 동이족이었다.
 
오늘은 우리가 대륙에서 건국해 왜를 지배한 가라(加羅);가야(伽倻)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가라(加羅);(伽倻)의 위치, 건국 시조는 맞는가
 
우리는 지금까지도 가라(加羅);가야(伽倻)의 건국이 서기 42년~561년으로 알고 있으며 그 시조(始祖)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사가 과연 맞는 것인지. 가야(伽倻)의 명칭도 가라(加羅)에서 시작해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어지고 있었고 가라(加羅);가야(伽倻)의 그 위치는 어디였을가 라는 의문이 든다. 역사를 연구하면 할수록 그 의문이 꼬리를 물고 나오게 된다.
 
중국과 일본은 가라(加羅);가야(伽倻)의 역사를 김수로왕(金首露王)으로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 필자가 보는 가야의 역사는 그 시조가 김수로왕(金首露王)이 아니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를 시조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보고 있다. 김수로왕 이전의 역사를 잘라버림으로써 우리는 가야(伽倻)가 신라보다 100년 정도 뒤늦게 건국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왜곡된 것으로 본다.
 
사기(史記) 권일(券一) 오제본기제일(五帝本紀第一)에는 전쟁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김유신의 선조인 ‘헌원(軒轅)으로 배달국(倍達國)이 제14대 자오지천황(慈烏支天黃);치우(蚩尤)와 73회 싸웠는데 헌원(軒轅)은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그런데 ‘치우(蚩尤)를 잡아 죽이고 여러 곳에 그 시신(屍身)을 묻었다’라고 하고 있다.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른 것으로 조작된 것이다.
 
치우(蚩尤)는 ‘전쟁의 신(神)’으로 중국은 치우를 삼황(三皇)으로 모시면서 우리 선조의 역사를 감추고 지우고 있다. 게다가 우리 역사의 옛 지명도 동으로, 동으로 옮기는 것도 부족해 지도도 숨기고 없애며, 제 멋대로 역사를 조작하고 변조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기록들을 가지고 역사를 논하고 있다.
 
가라(加羅);가야(伽倻)는 중국의 안휘성(安徽省) 서남부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우린 가야가 낙동강 유역에 있었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호금천씨의 후예이며 김유신 후예는 언제 이동해 왔을까. 이는 허구로 소호금천씨나 김유신은 대륙에 있었다.
 
그런데 김해(金海)에 수로왕(首露王)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경주에는 김유신의(金庾信)의 묘(墓)가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전(金庾信傳)의 김유신은 소호금천(少昊金天氏) 씨 후예로 이들은 산동성 곡부와 안휘성 청양에서 언제 어느 때 한반도로 이주했는가를 밝혀야 한다.
 
▲ 중국 안악 지방의 허황후의 능비와 복원 모습.
 
 
이들이 한반도에 이주했다는 정확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김수로왕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되는 지명이 안휘성 남부에 남아 있고 김유신과 관계된 지명이 소호(少昊)가 살던 청양 근처에 남아 있음으로 김해 수로왕릉과 경주의 김유신 능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이다.
 
가라(加羅);가야(伽倻)는 남으로 오월(吳越), 북으로 유연제 사이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또한 ‘삼국사기’ 이외의 다른 기록이 없는 한 김유신은 소호금천 씨의 후예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김유신은 대륙에 있었음이 판명되고 있다. 따라서 반도에 이주한 기록을 찾지 못하면 그 유적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야의 시조 역시 김수로왕(金首露王) 위로 올라가는 것이 옳다.
 
한편 김유신의 후예가 이 땅에 왔다면, 그것은 금관국(金官國)이 망한 이후이거나 733년 이후가 될 것이다. 여기서 하나는 서기 562년에 가야의 모반으로 신라의 평정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금관국이 패망한 서기 532년 이후에서 서기 562년 9월 사이에 한반도로 이주하여 온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서기 562년 9월, 가야가 모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니 반도에 이주한 가야인들은 503년 고구려로부터 독립한 신라에 공헌함으로서 수로왕과 김유신의 후손으로 정착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볼 수도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以上은 吳在成, ‘加羅史’26~27面.參照,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 가야 위치로 보는 동명·덕안·구자산·황산율·허촌·청양·귀지 지역
 
김유신과 그 선조는 한반도에 없었다 
 
일본은 1883년 대륙의 신라를 왜곡하기 위해 신라방(新羅坊)을 조작하고 있다. 한반도에 살았다는 기록이 없는 김유신을 반도로 가져오기 위해서 낙랑국(樂浪國)을 지웠다. 또한 가야(伽倻)의 시조를 김수로왕(金首露王)으로 하고 김수로왕 이전의 역사를 김일연(金一然)이 지웠다.
 
그러나 이를 숨길 수 없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로 유명한 최리(崔理)의 낙랑국(樂浪國)은 서기 32년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다. 이 낙랑국(樂浪國)은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에는 나와 있지도 않다. 이 낙랑국의 역사도 다시 복원해야 한다.
 
한편 우리 사학자 중에는 같은 이름이 등장하면 이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로 보려는 성향이 있다. 이 때문에 우리 민족사를 바르게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이 중 하나가 낙랑(樂浪)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왕이 다스리는 낙랑국(樂浪國)과 태수(太守)의 낙랑군(樂浪郡)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즉 옥저(沃沮)와 접하고 있는 낙랑국(樂浪國)과 대방(帶方)의 낙랑군(樂浪郡)을 구별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조선의 낙랑국(樂浪國)과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을 밝히지 않으려 하는 것은 더 한심한 것이다. 태수(太守)의 낙랑군(樂浪郡)은 서기 108년부터 한(漢)에 의해 쓰여지고, 고구려·위(魏)·백제(맥제) 등 한족(漢族)과 동이(東夷)가 두루 사용하였다.
 
사기(史記)에서 당서(唐書)까지 장안(長安) 중심의 기록과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왕(王)이 다스린 낙랑(樂浪)은 한족(漢族)의 기록에는 없고 오직 우리 기록에만 있다. 서기 196년의 최숭(崔崇)과 서기 32년의 최리(崔理)가 있을 뿐이다.
 
서기 196년은 고리(櫜離;高麗);高黎)의 해모수(解慕漱), 마한(馬韓);(강탈후의 위만(衛滿), 변한(弁韓);마한강탈 후분(後分)의 기준(箕準), 낙랑국(樂浪國)의 최숭(崔崇)등으로 4분되어 있었다.
 
분명히 한(漢)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하기 90년 이전에 이미 조선민(朝鮮民)의 국호(國號)로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왕은 바로 나라의 통치자로서 국가원수(國家元首)를 말하는 것이다.
 
옥저(沃沮)와 같이 있었던 낙랑군(樂浪郡)은 후한서(後漢書85)의 기록은 예(濊)의 서쪽에 있는데, 이 낙랑군(樂浪郡)은 석문(石門)·대방(帶方)·청하(淸河)·수성(遂城)이 있어야 군(郡)이 될 수 있다. 옥저와 같이 있었던 낙랑국(樂浪國)은 옥저지방(沃沮地方)에 있는 해주(海州)의 주위에 있었다. 석문(石門)·대방(帶方)·청하(淸河)·수성(遂城)이 있는 낙랑군과 다르다.
 
낙랑국과 낙랑군의 사이에는 예(濊)·고구려·부여(夫餘)가 있으니 태수가 옥저를 지배할 수 없고 왕이 예(濊)의 서쪽을 지배할 수 없다. 분명히 태수(太守)의 낙랑과 왕(王)의 낙랑은 다르다. 이를 하나로 보는 것은 역사를 모르는 자로 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以上은 吳在成,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132~133面. 外 多數書物을 參照,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낙랑군(樂浪郡)은 하북성(河北省) 서부에 있었고 낙랑국(樂浪國)은 반도와 만주(滿洲)에 있었다. 이를 낙랑(樂浪)이라는 이름이 같다고 왜곡은 있을 수 없다. 우리역사를 한반도로 ?Ю막졍? 것도 있을 수 없다. 한국사는 아시아역사임을 바로 알고 말을 해야 한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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