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한민족(韓民族) 국가의 조공 정체(正體)
중국은 조공문제를 갖고 우리를 지배한 것 같이 엮으려고 해 왔다. 중국사가들은 조공을 왜곡·선전해 한민족(韓民族)이 중국에 예속됐다고 하나 우리 고조선은 조공을 바친 적이 없다. 대등한 관계에서 교역을 했을 뿐이다. 우리가 하사한 것도 조공을 바쳤다고 억지를 쓰는 것은 중국 그리고 일본도 매 한가지다. 일본은 우리 백제왕이 하사한 칠지도(七支刀)를 백제가 조공으로 바쳤다고 하듯 중국은 한민족(韓民族)이 중국에 조공했다는 거짓 역사를 써 왔다. 고조선 당시에는 오히려 우리가 중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부여, 고구려, 발해 때는 대등하게 교역을 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자주독립은 물론이고 자존교만의 태도로 중국의 국위, 병력, 물자를 이용하는 능굴능신(能屈能伸, 능히 굽힐 줄 알고 펼 줄 아는 능력)의 외교정책을 폈다. 한 예를 든다면 사문 서취외집(事文類聚外集卷之十二)에 소문충공(蘇文忠公)이 항주(杭州)의 장으로 있을 때다. 고려에서 조공하는 사자가 교만해 관폐(官弊)를 끼치고 국서에 갑자(甲子)를 쓰며 송나라 연호를 쓰지 아니한 이유로 이를 거절한 뒤 고려의 사자가 다시 송나라 연호를 쓴 후에 그 국서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송나라 연호를 쓰지 아니한 것은 상국(上國)으로 대우하지 아니하고 동등국(同等國)으로 대우하면서 이용코자 한 것이다.
또 자치통감 절요속편(資治通鑑 節要續編)에는 고려가 송(宋)에 조공코자하니 송(宋)이 거절 했다고 한다. 송(宋)이 고려의 조공을 거절 한 것은 고려가 송을 상국으로 예우하지 않고 오직 송(宋)을 이용코자 한 까닭이다. 동서(同書)에 송의 진회(秦檜)가 “고려가 송을 적으로 대하면서 송(宋)을 섬긴다”고 했다. 이는 고려가 송(宋)을 도리어 적국으로 멸시하면서 송을 이용하기 위 조공한 것을 밝힌 것이다. 또 동서(同書)에 고려가 금(金,女眞)에 조공하니 금(金)이 고려를 반역자라 하면서 그 조공을 거절했다고 했다. 이는 고려가 똑 같이 적국으로 멸시하면서 금을 이용하기 위해 조공한 것을 밝힌 것이다. 고려가 남으로 중국을 업고 북방민족을 누르고 다시 북방민족을 업고 중국을 누르는 능굴능신(能屈能伸)의 외교정책으로 송 혹은 금(金)에 조공 한 것이다. 우리 한민족은 중국대륙의 수많은 제후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은 강력한 국가였지 중국이 말하는 약한 국가가 아니었다. 특히 고대에는 우리가 먼저 선주해서 4300여 년 전에 예맥조선(銳麥朝鮮)인 대국을 건설한 것이 판명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이 후안무치(厚顔無恥)하게도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중국에 조공을 받쳤다는 것은 역사를 변조·조작하는 수작인 것이다.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중국에 예속됐다고 역사를 변조·조작하며 동북공정으로 우리 고대사를 빼앗아가려 하고 있으나 이런 수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한민족(韓民族) 국가는 강대했고 중국에 예속된 일이 없다
우리는 역사적으로나 실제에서 중국보다 앞섰다. 단군고기(檀君古記) 기록은 환국시대(桓國時代)가 3301년, 환웅시대(桓雄時代)가 1565년이라 하고 있다. 한반도에는 지금부터 4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 당시 빙하기에 한반도에 이주한 후 1만5000년간 수렵생활을 했다. 한민족(韓民族)은 어느 민족보다도 선주(先住)했고 고대 12부족 중 가장 우수해 우리가 중국에 예속 된 일이 있을 수 없었다. 중국 사가들은 자신들이 후에 이주하며 기반을 잡고도 우리를 동이족이라고 의도적으로 하대·폄하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보다 국가가 오래 지속 된 일도 없었다. 마치 우리가 없는 물자를 교역을 통해 들여간 것이나 하사한 것조차 우리가 바쳤다는 식으로 왜곡하고 있는 중국이다. 고조선의 뒤를 이은 부여, 고구려, 발해도 강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려시대(高麗時代)도 상국(上國)으로 예우하지 않았음은 역사적 사실에서 드러난다. 중국사기(史記)에는 예맥시대에 전 세계는 중국, 9종의 이(夷), 8종의 적(狄), 7종의 융(戎), 6종의 만(蠻)으로 구성됐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은 이 같이 전 세계를 양(陽과) 음(陰)으로 구별했다. 양은 동남이고, 음은 서북이다. 중국은 황하와 화산(華山)이 남에 있어 양이다. 그리고 천(天)을 가남(街南)과 가북(街北)으로 구별했다. 가남(街南)은 양이고 가북(街北)은 음이다. 다시 가남(街南)은 중국이고 가북(街北)은 이적(夷狄)의 나라다. 양은 일(日)이고 세성(歲星)은 동방에 속하며 형혹성(熒惑星)은 남방에 속하고 전성(塡星)은 중앙에 속해 다 남과 동에 있어 양이 된다. 그러므로 양의 천(天)인 가남(街南)을 점유하니 양성(陽星)인 필성(畢星)이 주동(主動)이다. 예맥을 선두로 한 월씨(月氏) 제의(諸衣) 등 유목민족과 중국을 통일한 진(秦)과 모든 제후(諸侯)들, 그리고 일시 제패한 진(晉) 등은 서북에 있어 음이다. 음은 달이고 장군성(將軍星)인 태백성(太白星)은 서방에 속하고 신성(辰星)은 북방에 속했다. 즉, 북과 서에 있어 음이다. 그러므로 음의 천인 가북(街北)을 점유하니 음성(陰星)인 앙성(昻星)이 주동이다. 진(秦)과 진(晉)은 서남으로 흐르고 북에 처해 음이다. 그러므로 음의 세계를 대표한 예맥과 같으므로 호전적이다. 장군성인 태백성이 남에 있고 월(月)이 북에 있으면 예맥이 승리하고 중국이 패하며 그 반대이면 중국이 예맥의 침략에 불패한다. 그런데 장군성인 태백성이 중국에 들어와서 남에 있음으로 중국이 불패하니 예맥이 중국을 제압하고자 자주 중국을 침략한다. 이처럼 중국은 전 세계를 양의 세계와 음의 세계로 양분하고 전자는 중국이 차지하고 후자는 예맥이 대표적이라는 주장이다. 진(秦)과 진(晉) 같은 강대족(强大族)은 음의세계에 속해 예맥같이 호전적이다. 예맥은 모든 민족을 대표하며 양의 세계인 중국과 1승1패의 패(覇)를 다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천상천하를 양분해 하나는 중국이 차지하고 또 하나는 우리 한족(韓族)인 예맥이 대표적으로 일승일패의 패(覇)를 다투었다고 말한 것이다. 이 같이 한족(韓族)인 예맥이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등과 같이 존재할 때도 한족(漢族)을 정벌하고 제압한 것이 중국역사에 의해서도 판명되고 있다.
진(秦)을 멸망시킨 것은 우리 민족이었다
중국은 우리같이 고대에 몇 백 년을 이어온 나라들이 있지 않다. 중국역사는 나아가 믿을 수 없는 조작이 너무 많다. 중국을 통일한 진(秦)이 망한 것은 백성을 혹사하며 가혹한 학정(虐政)에 불평이 고도로 달했을 때다. 진승(陳勝)이 대택(大澤)에서 혁명군을 일으켜 진(秦)을 타도하자고 외치니 천하가 유수같이 호응했다. 이는 진(秦)이 강권으로 국민을 억압한 폐해에서 기인했다. 중국사가(史家)는 진(秦)이 망한 이유에 대해 진을 타도하자는 진승(陳勝)과 항우(項羽)라고 선전하고 있으나 사실은 다르다. 진(秦)은 예맥(銳麥)과 남월(南越)의 전란으로 혼란에 빠졌을 때 진승(陳勝)과 항우(項羽)가 궐기해 쓰러졌다. 따라서 진승(陳勝)과 항우(項羽)가 진(秦)을 타도했다 함은 표면(表面)을 보는 선전이고, 실제로 진(秦)을 타도 한 주인공은 우리한 한족(韓族)인 예맥(銳麥)과 남월(南越)이었다.
중국 한서(漢書九十九中 列傳 第六十九中 王莽)에는 엄우(嚴尤)가 왕망(王莽)에 대해 부여(夫餘)와 예맥(銳麥)이 다시 일어나면 대우(大憂, 크게 우려스러운 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대우(大憂)는 대 정벌(大征伐)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예맥(銳麥)과 부여(夫餘)가 한을 크게 정벌한 것을 말 하는 것이니 중국으로서는 심히 근심스러운 일이었다. 한서(漢書)에 예맥(銳麥)이 한(漢)나라 문제(文帝), 경제(景帝) 시대에 한(漢)을 정벌해 많은 해를 끼쳤다고 기록 돼 있다.(漢書 二十四下 食貨志 第四下). 또 전한서(前漢書)에는 소망(蕭望)이 예맥(銳麥)에게 신(信)을 지키고 양보하는 것이 국가보존의 양책(良策)이라고 주장하니 천자(天子)가 그 주장을 채택했다고 한다. 또한 고구려 모본대왕시대(慕本大王時代)에 고구려 군이 한나라 요지 태원(太原)을 점령하니 요동태수 채동(蔡彤)이 항복하고 배상금을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前漢書 七十八 蕭望傳 第四十八). 그런데 후한서(後漢書)에는 채동(蔡彤)이 은신(恩信)으로 불러 항복받았다고 거꾸로 기록했다. 완전히 180도 다르게 역사를 뒤바뀌어 놓았다. 그리고 배상금을 은신(恩信)으로 썼다. 이것이 중국의 역사조작 수법이다.
역사를 거꾸로 왜곡하는 중국에 주눅 들지 말아야
중국은 인류의 종주국(宗主國)이라고 자처하며 패한 것도 승리했다고 기록하고 배상금을 은신(恩信)이라고 기록하는 상습이 있다. 이는 중국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예맥에 신(信)을 지키고 양보했다는 것은 예맥(銳麥)의 대정벌에 항복해 배상금을 바치고 영토를 양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을 정복해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후에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토(玄菟) 등 삼군(三郡)을 예맥(銳麥)에게 빼앗긴 사실도 예맥(銳麥)이 한(漢)을 제압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웅변한다. 또한 예맥(銳麥)은 후(候), 읍(邑), 군(君)아라는 삼부족(三部族)이 연합해 통치했다. 그런데 한무제(漢武帝)가 많은 재물로 군(君)이라는 부족(部族) 남려(南閭)를 매수해 창해군(倉海郡)을 설치했다가 1년 반 만에 철수한 것도 한족(漢族)이 무력으로 예맥(銳麥)을 당하지 못한 것을 반증한다.
중국의 나라들은 그 수명이 아주 짧고 단명한 것이 그 특징이라고 말 할 수 있을 만큼 거의 300년 이하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재미있다고 읽는 삼국지(三國志)도 6000여명의 이름이 수록될 만큼 방대한 지면을 차지하는데, 여기서 나오는 3국(三國)도 평균 47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일 뿐이다. 초(楚)는 43년, 위(魏)는 46년, 오(吳)는 53년이 전부다. 겨우 43~53년이다. 중국역사상 가장 강한 나라였던 진시황의 진(秦)도 불과 41년이었고 수(隨)는 그보다 못한 고작 37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당(唐)은 289년이고, 진(秦)뒤에 나온 진(晉)나라는 14년 역사일 뿐이다. 중국이 우리나라를 제후국(諸侯國)이하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는 이들의 역사왜곡에 현혹되지도 주눅 들지도 말고 이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연구에 전력투구해야 한다. 우리 학자들의 분발을 촉구한다. 역사 왜곡은 도둑질하는 행위다. 나가가 범죄행위다. 우리는 찬란한 우리의 역사를 되찾아 역사의 지평을 세계로 뻗어 나가게 해야 한다. 뒤늦게 역사 찾기에 나선 필자도 우리 사학계에 간곡히 바라고 기대해 마지않는 바다.(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선생과 최인 선생의 연구내용 중 일부를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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