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고대 역사를 말할 때, 중국인들은 주(周)·진(秦)·한(漢)의 전통(傳統)을 이어가는 장안(長安);서안(西安) 중심의 한족(漢族)들은 우리를 동이(東夷)라고 하는데 이는 자기들 사는 동쪽에 우리가 살기에 모든 사서(史書)에 동이(東夷)라고 기록한 것이다.
중국사서인 ‘후한서(後漢書)’에 의하면 ‘동방왈이(東方曰夷)’라 하여 동쪽을 이(夷)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최초의 국호(國號)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상고 역사가 없고 그들이 쓴 사서(史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8의 13과 40에 리(黎)의 두음법칙의 음(音)이 ‘(夷)’로 되니 이(夷)와 리(黎)음은 같은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두음법칙에서도 이미 정착되어 문자가 다른 것은 장미음법칙(長尾音法則)에 의해서가 아닌가 본다.
중국은 배달국(倍達國)의 제14대 환웅(桓雄)이신 치우천자(蚩尤天子;자오지천황(慈烏支天皇)이 철 투구와 갑옷을 입고 중원을 평정하며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조상이며 순(舜) 임금의 8대조이기도 한 헌원(軒轅)과 73회나 싸워 이겼는데, 중국은 이 모두를 중국 황제로 올리고 있다.
그런데 이들 우리 배달국시대의 황제들도 대륙에 살고 대륙에 묻혔다. 치우천자는 산동성(山東省)에 묻혔고 헌원(軒轅) 황제도 대륙에 묻혔고 그 자손 김유신(金庾信)도 대륙에 묻혔다. 이 선조들은 동이족으로 사기(史記)에 이 때 이미 철(鐵)을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즉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철고이자야(銕古夷字也, 史記2~5)’라고 동쪽에 쇠붙이를 사용하는 민족이기에 동이(東夷)라 부르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과, 서신라말(西新羅末)까지도 우리민족을 동이(東夷)로 나타낸 것이 중요하다.
장안(長安)에서 우리(右黎) 민족을 표기(標記)한 것이 동이(東夷)이고, 이 말은 구리(九黎)에서 조선(朝鮮)을 거쳐 고구리(高句麗)·백제(百濟;(貊濟)·가야(伽倻)·신라(新羅)·왜(倭) 시대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최초의 동이(東夷)의 유적은 산동성의 동평(東平)과 거야(鉅野)에 있다.
또한 그 주위에 고구리(高句麗)의 서안평(西安平)·항성(項城)·광주(光州)·섭라(涉羅)의 지명이 있으니 9세기(世紀) 이전의 동이(東夷)의 해명(解明)없이 역사를 바르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동이(東夷)의 시발점은 어디인가? 동이(東夷)의 시발점(始發点)이라는 것은 한족(漢族)과 동이(東夷)의 경계선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면 장안(長安)에서 볼 때 동이(東夷)의 시발점(始發点)은 어디였나. 그것은 우리 민족의 서쪽 경계선(境界線)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된다. 우리는 상고시대(上古時代)와 고대(古代)에 동이(東夷)의 시발점을 알아야 우리 민족의 영역(領域)을 바로 밝힐 수 있고 민족사(民族史)를 바르게 정립(鼎立)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은 동이(東夷)에 관해 당시 나라들과 지명(地名) 등을 고찰(考察)하며 살펴보고자 한다.
상고시대와 고대의 동이(東夷)의 경계선은 어디인가
중국은 사실상 상고시대(上古時代)의 경계선을 논할 여지가 없다. 왜냐면 중국역사는 상고사가 없고 그들의 말하는 상고역사(上古歷史)는 다 우리민족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중국역사는 고대(古代)에 와서 그 출발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의 말하는 치우(蚩尤)와 헌원(軒轅)은 우리 배달국시대(倍達國時代) 우리 조상으로 중국 역사에 편입(編入) 될 수가 없는 동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리시대(九黎時代)의 동이의 시발점은 치우천자(蚩尤天子)의 능(陵)이 산동성(山東省) 동평(東平)에 있으니 이보다는 서쪽 대륙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朝鮮時代;古朝鮮時代)의 기자(箕子)가 조선(朝鮮) 땅에 살았다고 하고 있는데 그곳은 하남성(河南省) 서화(西華)라고 가록을 하고 있다. (史記 38·漢書 28·三國志 30·後漢書 85·大淸一統志 172).
왜곡(歪曲)된 반도사관역사에 물들여진 반도식민사관자들은 하남성의 서화(西華)가 조선의 땅임을 모르고 반도에 맞추려만 하는데 이곳은 우리 동이(東夷)의 영역(領域)임을 숨길 수가 없다. 더구나 이곳은 조선(朝鮮)과 접해 있는 연(燕)과 조선의 경계를 봐도 잘 알 수 있다.
소진(蘇秦)시대의 연(燕)이 태행산맥(太行山脈)의 서쪽에 있었고 산맥 동쪽은 조선(朝鮮)이었다. 조선시대는 한수(漢水;漢江;黃河) 북쪽은 태행산맥(太行山脈)을 경계로 남쪽은 서화(西華)중심의 서쪽을 동이(東夷)의 경계로 보고 있다. (소진(蘇秦)의 연(燕)은 사기(史記) 69에 나와 있다.)
그곳은 사면의 8개의 지명(地名) 중 안문(雁門)·삭(朔)·람(嵐)·운중(雲中)·구원(九原;太原?)·로성(鹵城;(潞城)이 있어 4개를 알 수 있고 북쪽의 태행산맥(太行山脈)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연(燕)은 태행산맥(太行山脈)의 동쪽으로 넘을 수 없다. (東夷歷史) 집(集) 참고).
한족(漢族)과 동이백제(東夷百濟(맥제)의 경계(시발점)에서 동이백제(東夷百濟)는 요(遼)의 동쪽요동(遼東)에 있으며 요(遼)의 서쪽 요서(遼西)에 진평이군(晉平二郡)이 있었는데 서화(西華)의 서북쪽에 진성(晉城)과 고평(高平)이 있으니 이를 줄이면 진평이군(晉平二郡)이 된다. 이 진평이군(晉平二郡)은 태행산맥(太行山脈)의 서쪽에 있는 것이다. 이곳은 만리장성의 안쪽이다.
백제가 660년에 망하고 그 땅에 덕안(德安)·동명(東明) 등을 두었는데 서화(西華) 남쪽에 덕안이 있고, 동명은 서화(西華)의 동북에 있으니 진평이군(晉平二郡)과 덕안과 동명을 중심으로 동쪽에 청하·평원·황산·백마하·동명·제성·항성·동성·잠산·독산·섭라 등이 있다고 중국사서(史書)인 송서(宋書)·양서(梁書)·남사(南史)·신구당서(新舊唐書)가 이를 말하고 있다.
또한 당(唐)과 동이신라(東夷新羅);사로신라(斯盧新羅)의 경계(境界)는 항성(項城)이다. 당(唐)의 교역항(交易港)인 이 항성(項城)은 서화(西華) 남쪽에 있다. 이미 밝힌 대로 태행산맥과 서화와 덕안을 경계로 한족과 동이의 갈림길이 8세기 이전 우리의 서쪽 경계선이었던 것이다.
이를 지금에 와서 반도식민사관자(半島植民史觀者)들이 아무리 우겨도 부인(否認)할 수 없음에도 우리나라의 고대 영역(領域)의 경계선을 근거 없이 제멋대로 말함은 정신이상자와 진배없는 것이 아닌가! 오해받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는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以上은 吳在成,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右犂)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九犂系,‘斯盧新羅史’,‘百濟史’‘加羅史’.外 多數書冊 參照 引用)
바른 역사사관 정립으로 찬란한 역사 복원해야
우리역사는 반도의 역사가 아니라, 유라시아의 역사임은 중국의 역사학자인 임해상(林海祥)도 지구의 땅 40%가 유라시아인데 이 유라시아의 80%가 동이(東夷)이고 중국은 아주 작은 지역이라고 했다. 이런 역사를 반도로 끌어 들여 맞추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것이다.
세계 학지들이 환국(桓國)때부터 배달국(倍達國)·예맥(濊貊;(銳麥)·부여(夫餘)·고구려·백제·신라·가야·발해·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가 세계문명(世界文明)을 선도한 것을 비롯해서 문자(文字)며 과학과 문화를 인류사회에 끼친 영향은 세계가 놀라울 정도로 감탄을 한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조선총독부가 포악한 폭정을 하면서 우리역사를 왜곡했으나 우리의 위대한 역사는 고대부터 일본에 문물을 전수시켜 원시생활을 하던 일본을 깨우쳐준 것을 비롯해 우리가 고대부터 유라시아와 외국에 선진문명을 전해 준 것을 알고 있다.
이는 일본의 정치인과 사학자들도 선진문명을 일으킨 우리를 놀라워했다. 그러기에 조선총독부의 마지막 총통이라는 아베 노부유키(安倍信行)도 총독부의 문을 닫으며 무엇이라 했는가.
1945년 9월 5일 “일본은 졌다. 그러나 조선이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찾으려면 100년이란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일본이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사관을 심어 놓았다. 결국 조선인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의 조선은 결국 일본의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고 했다. 헌데 지금 73년이 지났어도 달라진 것이 없다.
지금의 우리사회를 보면 이를 알고도 남는다. 일본이 식민정치를 하기 위해 만든 법제를 해방 후인 1946년 4월, 4300여 개를 다 고쳤으나 우리는 지금도 일본이 만든 법들을 그대로 쓰며 19세기적 사고와 법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떼법’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상황이다.
대학에서는 지금도 19세기 법을 그대로 가르치고, 교육은 그전보다도 후퇴해 가치관은 변질되고 국가공동체적 사고와 의식은 실종되어 종적인 삶음은 있어도 횡적인 삶이 없는 삶은 거짓과 기만으로 애국심도 찾아 볼 수 없고 연대의식도 실종돼 애국심은 찾아 볼 수 없다. ‘돈 벌어라’, ‘출세하라’는 식으로 권력 주변을 돌며 섞을 대로 섞은 면면을 확인할 수 있다.
참으로 슬픈 현실이 오늘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생각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바로 아베 노부유키(安倍信行)가 말한 그대로 식민교육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이 식민사관을 말살해야 함에도 직위와 돈에 안주하는 자들에 의해서 우리역사는 뒤 엎어진 대로 광복 73년이 지나도 그대로이다. 이제는 달라져야 함에도 위정자·교육계·학계도 부패할 대로 부패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걱정이 들 정도이다.
중국 시진핑(習近平)은 트럼프미 대통령에게 자기들이 우리나라를 1천년 이상 지배하였다고 하는데 할아버지가 아버지보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되는 역사는 없다. 참으로 가관(可觀)이다. 우리의 ‘삼국사’나 ‘중국25사’ 등 사서(史書)를 시대별로 연구해보면 자명(自明)해 진다.
중국은 서기전 28년 한(漢)나라가 동이(東夷)를 한족(漢族)에 흡수했다고 하는데 유방도 동이족이고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曹操)·유비(劉備)·관우(關羽)·장비(張飛)·제갈공명(諸葛孔明)이 모두 동이족(東夷族)으로 묘족(苗族)이거나 고구려 백제의 후손(後孫)들임은 숨길 수 없다.
왜 중국은 동이족임을 숨기려는가
중국은 649년 이전의 장안중심(長安中心)의 한족사(漢族史)에서 왜(倭)가 양자강 이남에 있었음을 분명히 했음에도 이를 숨기려하나 숨길 수 없다. 또한 서라벌(徐羅伐)의 지증왕(智證王) 위에 대륙의 사로신라(斯盧新羅;(西新羅)·백제·왜(倭)·가야(伽倻) 등 모든 동이족을 대륙에서 반도로 옮기기 위해 동이(東夷)나라들의 역사를 빼앗아 없애는 작업을 당(唐) 때부터 시작하며 중국은 사료(史料)도 없앴다. 참으로 못 말리는 족속이다. 이렇다고 있는 역사를 지울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중국은 고구려도 지방정권(地方政權)이라고 했다가 고구려가 연호를 쓰고 대륙을 호령한 것을 숨길 수 없어서 다시 집어넣는 중국은 일본과 발을 맞추어 우리역사를 왜곡 조작(造作), 변조(變造)를 일삼으나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에 왜인(倭人)이 있어서 실패한다.
중국과 일본은 왜(倭)가 양자강 이남에 있었던 사실을 철저하게 숨기려 하지만 숨길 수 없다. 왜왕(倭王) 구천(句踐)과 소강(小康) 때문도 있겠으나 왜인(倭人)은 문신(文身)을 하고 인육(人肉)도 먹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왜인(倭人)은 고구려·백제·가야·신라의 지배를 받았다.
타이완(臺灣)에서는 80연대까지 인육(人肉) ‘만두’를 해 먹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라 한다. 이 타이완(臺灣)은 670년에 일본 국호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하도록 당(唐)이 승낙을 받은 것을 일본은 숨긴다. 일본에 대해 ‘구당서(舊唐書)’ 이전의 사서(史書)를 보면 다 알 수 있다.
또한 1200년 전에 로코 폴로가 중국 동해안을 여행하면서 저 멀리 보는 섬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모른다고 한 ‘지판궈’가 이때부터 서양에선 저편의 나라, 제팬(Japan)이 되었는데, 이 제팬(Japan)은 현재의 일본 열도가 아니라 타이완(Taiwan;臺灣)이었다.
지금 일본열도는 명(明)나라 시대인 1403년에 일본(日本;Japan)이라고 쓰도록 한 것을 이미 다 밝혔는데 일본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고대 일본(日本)의 일식(日蝕) 관측지도 타이완(Taiwan;臺灣)을 중심으로 버마·하와이·뉴질랜드까지 나오는데 이를 숨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1200년대까지 백제는 동남아인들이 백제(百濟)가 660년 나당연합군에 망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고려사’에 나온다. 이는 당시 교통이 원할 하지 않은 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왜(倭;日本)도 우리와 같은 동이족으로 일본이 ‘단일민족’도 아님은 일본인들이 더 잘 알고 있다.
그 당시 왜인(倭人)들은 문신(文身)을 많이 했는데 그 이유도 문신은 중앙에 노예(奴隸)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문신(文身)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을 정도다. 당시 범죄인(犯罪人)에게 문신(文身)을 하였는데, 노예를 쓰는 쪽이 범죄인을 노예로 쓰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라 본다.
그리고 1600년 이전 타이완 역사는 없다고 한다. 왜일까? 불리한 역사는 숨기는 작태(作態)라 본다. 중국과 일본은 우리가 앞선 문명국가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허황후(許皇后)도 인도에서 왔다고 했는데 중국내에서 사로신라(斯盧新羅)에 온 것이고 황후가 가져 왔다는 나전칠기(螺鈿漆器)도 가야(伽倻) 신안에서 나온 것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지금 그 진위가 다 밝혀졌다.
글을 맺으며
중국은 배달국 황제(黃帝) 때부터 1911년 청(淸)나라가 멸망할 때 까지 558명의 제왕(帝王)이 있었다는데 그중 396명은 황제라 불렀고 162명은 왕이라 불렀다고 하나 꾸며진 것들이 다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 제왕들이 거의 다 동이족이라 하면 반도식민사관자들은 아니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사서(史書)를 연구해보면 자명해지는 것이다. 거의 동이족임이 확인된다.
중국은 지역과 지명도 동으로, 동으로 옮기며 청해성(淸海省)에 서해·남해·북해는 있으나 동해(東海)는 없다. 청해(淸海) 동쪽은 다 동해라 하며 역사를 제멋대로 왜곡하고 있음을 본다.
우리역사는 다시 말하지만 결코 반도역사가 아니다. 아시아의 역사이며, 또한 유라시아의 역사이다. 유라시아를 지배한 우리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가 재미로 읽는 수호지(水湖志)도 고구려 백제의 부흥운동사 기반이다. 양산박은 백제 땅이고, 그 주변에 황산·웅진·웅진 남쪽에 동명, 동명의 서쪽과 동쪽이 태산(太山)이고, 그 남쪽이 주류성인데 백마강 서쪽이다.
이 옛 고토에서 우리 선조들은 찬란한 문명을 일으키고 지배한 고토를 제대로 알고 말을 해야 한다. 또한 지금의 중국 선조들도 우리와 같은 피를 나누고 있다. 대륙은 우리의 선조들이 살던 옛 고토이다. 장개석(蔣介石) 총통은 상해임시정부 이시형(李始滎) 부통령을 만났을 때 이런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데 대해 자기의 고향이 옛날 백제 땅이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들의 선조는 대륙의 주인이었는데 당신은 그것도 모르고 있었소?. 그러니 나라를 빼앗겼지” 장개석 총통은 자기가 백제의 후손임을 숨기지 않았다. 손문(孫文)도 동이족임을 이미 밝혔다. 헌데 못난 인간들은 자기 조상도 모르고 역사도 왜곡된 것을 자기역사라 하고 있다. 이제 이런 바보짓은 접어야 한다. 조상에게 죄 지우며 부끄러움도 모르는 자 인간이 아니다.
타이완의 역사학자 서양지(徐亮之) 교수도 1943년 10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 “4천 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중원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이 점령하여 은(殷)과 주(周) 이전과 은(殷)나라 주(周)나라 때에도 동이(東夷)의 활동무대가 실로 오늘날의 산동· 하북(河北)·발해연안·하남·강소·안휘·호북지방·요동반도·조선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 산동반도가 그 중심이었다”고 했다. 이곳이 반도인가, 이곳은 엄연한 대륙이다.
외국의 학자도 이를 말하는 마당에 우리나라 반도식민사관자들은 수치도 모르는 인간이 되어 있다. 이제 선조에게 지울 수 없는 죄악임을 자각하고 새 결단과 실천으로 우리역사 바로 세우는데 나서야 한다. 국가와 민족을 저버린 자 그 자손은 치욕의 자손으로 해서야 되겠는가.
역사는 지혜로운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신의 축복이라고 본다. 이제 우리 다 같이 지혜로운 자가 되어 이 나라의 역사를 바로 바로 찾고 바로세우는 자가 되시기를 기대해 지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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