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빙하시대(氷河時代:洪績世)라 하면 거의 200만년 전부터 시작했다고 말을 한다. 홍적세(洪績世)는 빙하가 달한 추운 빙기(氷期)가 4회 있었고 사이에 따뜻한 간빙기(間氷期)가 3회 있었다. 약 1만년 전부터 현재와 같은 충적세(沖積世)가 된 것이다.
원시시대(原始時代) 인류의 발전을 보면 인류(人類)가 처음으로 도구(道具)를 만들기 시작해 농경(農耕)이 시작하기까지 거의 200만년 간(間)을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라고 한다. 이 기간은 인류역사(人類歷史)의 99% 이상이 되는 기간이다.
또한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는 마제석기(磨製石器)를 사용해 농경(農耕), 목축(牧畜)을 시작한 시대를 말하며 그 이전 타제석기(打製石器)를 사용해 수렵(狩獵), 채집(採集)을 하고 있던 시대를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라고 말한다.
인류(人類)는 긴긴 구석기시대의 늦은 진보(進步) 후 농경(農耕)과 목축을 시작했다. 그것은 각지의 태지(台地)나 나무가 없는 대초원 구주 동부와 아시아 서남부등 스탭프(Steppe)라 하는 대초원지대를 말한다. 농경은 큰 강의 유역에서 발달해 많은 인구를 먹여 살렸다.
우리는 이미 유라시아를 80%나 지배하고 있음을 중국 임해상 같은 학자도 말할 정도다. 인류문명과 국가의 생성은 대하(大河)유역에서 농경의 대 발달로 생산이 증대함에 따라 인류문명이 일어나고 이를 자기 것으로 하는 지배자도 출현해 국가(國家)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문명에 가장 영향을 준 민족이 초원의 기마민족(騎馬民族)이었다. 이 기마민족은 바로 우리 민족으로 이들이 기마전술을 몸에 익혀 기동력을 바로 인류문명을 낳게 하였다. 오늘은 유라시아를 지배한 민족으로 인류문명사를 일으킨 우리가 대륙인이라는 것을 밝히려 한다.
우리는 대륙에서 한족(漢族)을 압도했다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三國時代)에도 한족(漢族)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을 뿐더러 도리어 한족(漢族)과 일승일패(一勝一敗)의 쟁패전(爭覇戰)을 전개하고 그 쟁패전에서 우리가 승리했다. 춘추전국시대도 중국을 정벌해 거의 멸망케 한 민족은 예맥(濊貊:銳麥)이 분명하다.
고대 예맥(濊貊:銳麥朝鮮)은 동주(東周)시대부터 한무제(漢武帝)시대까지 천여 년 동안 중국을 정벌하고 정복 지배한 사실이 중국사에 명기돼 있음을 제대로 알고 말을 해야 한다.
우리는 삼국시대 이전에도 대륙에 있는 나라들을 정벌하고 예맥(濊貊:銳麥)이 정복하여 지배했다. 예컨대 시전비궁구장(詩傳閟宮九章)에 신안호(新安胡)가 노(魯)를 정복했다고(史記三十四, 燕召公 世家 第四) 하고, 연(燕)이 경제적 지원도 받았다고 했다(史記百二十九貨殖列傳, 第六十九, 烏氏倮). 이는 경제적으로도 연(燕)의 상위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 진실은 진(秦)이 예맥과 남월의 전란(戰亂)으로 혼란에 빠진 것을 계기로 진승(陳勝)과 항우(項羽)가 궐기했던 것이다. 진승(陳勝)은 대택(大澤)에서 혁명군을 일으켰다. 이는 강권으로 국민을 억압해온 폐해에 대해 천하가 호응한 것으로 진(秦)을 타도한 자는 예맥과 남월(南越)이다.
전 세계는 중국, 9종의 이(夷), 8종의 적(狄), 7종의 융(戎), 6종의 만(蠻)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당시 예맥은 대표적으로 중국과 1대 1 쟁패전에서 진(秦)을 타도한 것뿐만 아니라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을 지배하고 또한 한(漢)을 정벌한 것도 중국사서는 말하고 있다.
한서(漢書 二十四下, 食貨志 第四下)에는 예맥이 한(漢)나라 문제(文帝), 경제(景帝)시대에 한(漢)을 정벌해 많은 해를 끼쳤다고 했다. 또한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정복해 한사군을 설치한 후에 진번(眞番)·임둔(臨屯)·현토(玄菟)등 3군(郡)을 빼앗긴 사실도 예맥(濊貊:銳麥)이 한(漢)을 제압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崔仁, ‘韓國學講義’. 72~93 參考引用.)
또한 예맥은 후(候)·읍(邑)·군(郡)이라는 3부족이 연합해 통치했다. 그런데 한무제(漢武帝)가 많은 재물로서 군(郡)이라는 부족 남려(南閭)를 매수해 창해군(倉海郡) 을 설치했다가 1년 반 만에 철수한 것도 한족이 무력으로 예맥을 저항치 못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강대한 시대가 진(秦)·수(隋)·당(唐)시대인데 진(秦)은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중국 역사상 가장 강대한 보기 드문 대제국(大帝國)이고 수(隨)는 특기할 강국이고 당(唐)은 수보다 더 강대한 나라로 세계 역사상 기록할 강국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동양의 강국으로 동양의 패자(覇者)라는 진(秦)·수(隋)·당(唐)을 이긴 민족이다. 예맥은 진(秦)을 타도하고 고구려는 수(隨)와 당(唐)을 격파했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는 유연제노오월을 정복한 동양의 제패자(制覇者)임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김일연(金一然)은 우리 역사를 반도사(半島史)로 만든 원조(元祖)가 되었다. 그가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우리 상고사(上古史)가 없다. 세계 최초의 시원국(始源國)도 지우고 우리 상고사를 없앨 뿐 아니라 우리 역사를 반도사(半島史)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은 ‘사기(史記)’에서 ‘남제서(南齊書)’까지 유연제노오월 지역을 벗어난 적이 없는데 이 역사를 반도사로 옮긴 자가 바로 김일연(金一然)인 것은 용납할 수없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역사(歷史)를 중국(中國) 사서(史書)들도 우리가 대륙사인 것을 인정하고 있는데도 김일연(金一然)은 우리 역사를 반도사(半島史)로 한 것이다. 중국은 ‘사기(史記)’에서 ‘남제서(南齊書)’까지 유연제노 오월지역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말하는데 이 역사를 반도사로 옮긴 김일연(金一然)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의 원조가 되고 있다.
김일연(金一然)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지으며 삼국 이전을 기록함에 있어서 ‘위서(魏書)’를 인용해 단군조선, 배구전을 인용해 기자(箕子)를 기록하였고 ‘전한서’를 인용해 위만조선과 북부여를, ‘신구당서’를 인용해 변한과 백제를, ‘위지(魏志)’를 통해 마한을, 신당서를 인용해 낙랑군을, ‘통전’을 통해서 발해를, ‘후한서’를 통해 진한을 기록했다.
또한 삼국시대는 ‘삼국사’를 인용해 고구려·백제·신라를 나타내고 신라·가라·중심사를 만들었으나 ‘18사 동이전’과 ‘삼국사(三國史)’를 재현(再現)하지 못했다. 만약 그때 ‘18사 동이전’을 ‘남제서’ 권58과 고리(高黎)에 각각 대입했다면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 이후 한반도와 만주(滿洲)에 맞추려는 ‘삼국사’를 취사선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한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연구초(朝鮮史硏究抄)’에서 보듯 ‘삼국사(三國史)’와 ‘삼국지(三國志)’를 한반도로 맞추려 하였고 한-조선-대한(大韓)까지 ‘삼국사(三國史)’를 조선 반도에 맞추려 해도 일치되지 않는다며 고치려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삼국사(三國史)’는 고구려 해모수 천제(天帝)에서 신라 경순왕(敬順王)까지 기간을 기록했고, 지나(支那)는 진(秦)나라에서 당(唐)나라까지 존재했던 시대의 기록이다. 우리는 ‘삼국사’ 이전에 고구려의 유기(留記), 신집(新集)이 있었고 백제의 서기, 신라의 국사가 있었으나 지금의 ‘삼국사’가 유일의 사서(史書)이다. 그러나 이를 조선반도에 대입해서 검증도 해보지 않고 700년을 무심히 보냈다. 또한 ‘남제서’ 권58을 입증이나 검증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송(宋)나라는 1100년 세안례(稅安禮)와 혹소식(惑蘇軾)에 의해 ‘역대지리지장도’를 지역역사로 만들면서 ‘남제서’ 권58지역의 ‘18사 동이전’ 기록을 한만(韓滿)역사로 밀어내는 흔적을 남겼다. 즉 ‘남제서(南齊書)’ 권58이 ‘삼국사’ 권46을 입증했으나 ‘소제남국지도(蕭齊南國之圖)’는 ‘남제서’ 권58 지역 18사 동이전을 지나(支那)에서 완전히 지우려 했다.
또한 고리에서는 ‘삼국유사’가 18사 동이 무대를 한만(韓滿)으로 고정화 시켜버린 결과로 이승휴의 ‘제왕운기’ 이후 ‘18사 동이전’과 조선 때 기자를 한반도에서 활동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삼국유사’와 ‘18사 동이전’을 재현하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벌써 밝혀졌을 것이다.
그러나 한-조선에서는 마한지역에 우리 역사를 맞추려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고 검증에 무심하였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 역사기록 한반도에 맞출 수 없다
송(宋)나라부터 당(唐)나라 이전 진한(秦漢)을 계승하는 장안(長安) 세력의 서이(西夷)와 동이(東夷)를 계승하는 두 갈래 사서(史書)가 춤을 추게 만들었다. 이것은 중국 4천년 역사상 가장 강대한 시대가 진(秦)·수(隨)·당(唐) 시대이다. 당(唐) 시대는 가장 번성(繁盛)한 시대이다.
이 당시 장안은 동서 약 9km, 남북 약 8km에 미치는 광대한 도시로 궁전과 관청이 나란히 서 있고 사원(寺院)의 탑도 높게 갖추어 그 건축의 광대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서역지방(西域地方)의 제민족(諸民族)도 교역(交易)으로 방문해 마니교와 기독교의 일파인 경교(景敎)의 사원(寺院)도 있었다. 음식점에는 눈이 푸른 이란인의 아가씨도 있어서 마치 국제도시의 모양이었다고 한다. 각지에서 유학생이 많아 인구는 100만에 달했다고 한다.
이 장안도 우리 민족의 터전이었음을 잊고 우리는 역사기록을 막무가내로 한반도에 맞추어 놓고 있으나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역사기록이 없어지지 않는 한, 완전히 숨길 수도 없다.
그런데 조선조 초기 권근(權近)의 ‘삼국사략서’에서 나타나듯 ‘국시대사료’를 한 권으로 줄여서라도 한반도에 맞추려 하였고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사연구초’로 고려 이전 사서인 ‘삼국사(三國史)’나 ‘18사 동이전’을 한반도 역사로 만들려고 하였다.
또한 일본의 학자들은 ‘삼국사(三國史)’ 초기기록을 믿을 수 없는 사서로 만들어 대한암흑기를 가르쳤다. 당나라 패망 이후 ‘삼국사’ 권46과 ‘남제서’ 권58 지역은 동이(舜東夷之人)들이 신라 말까지 활동한 것을 밝혀야 하는데 이를 밝히기는 커녕 숨기고 왜곡만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왕조(王朝) 때는 왕조사관(王朝史觀)에 의함이었고 공화제(共和制)에서는 민족사관(民族史觀)이 첨부되고 국민주권(國民主權)시대로 전환되면서 19세기 ‘아(我)와 비아(非我)’의 구분으로 우리의 삼국 역사를 20세기의 구별에 맞추려 했다. 이는 삼국사시대(三國史時代)를 재현(再現)할 뿐이지 금세기에 맞추어야할 사항이 아님에도 이를 망각한 역사인식이 문제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의 구별(區別)이 아니고 삼국인(三國人)의 후예(後裔)로 하나가 되기 위해 현재의 민족구별이 아닌 삼국후예(三國後裔)가 하나가 되는 마음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삼국사(三國)史)’를 재현(再現)해 ‘삼국사(三國史)’의 후예(後裔)가 하나로 보는 사관(史觀)이 성립되어야 삼국 후예가 하나 되는 이정표(里程標)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삼국사(三國史)’연구는 이 사료(史料)에 의한 불신(不信)을 잠재우는 방법이란 사실을 사실(史實)대로 보이게 하는 방법뿐이다. 중국의 ‘18사 동이전’과 ‘남제서(南齊書)’ 권58을 조선반도에 대입해 보고 삼국의 역사도 ‘삼국사(三國史)’ 권46과 조선반도에 각 대입(代入)해 공통부분의 위치를 찾고 비 공통부분을 정리하면 밝힐 수 있는 것이다.
삼국사보다 먼저 출판된 18사 동이전의 무대를 재조명하면 ‘남제서(南齊書)’ 권58 지역은 ‘삼국(三國史)’ 권46과 동일함으로 ‘18사 동이전’을 ‘남제서’ 권58과 한반도에 대입해 기록된 상황이 적합한 지역을 찾으면 우리가 대륙에서 얼마나 자랑스러운 역사인가 알 수 있다.
글을 맺으며
우리 역사를 반도 안에 가두려 하여도 가둘 수 없다. 왜냐하면 삼국시대 지명이 거의 대륙에 있고 인구(人口)로 본 역사에서나 군사동원력을 비교해도 알 수 있다. 삼국(三國)과 장안(長安)과의 교역기간(交易期間), 신라(新羅)의 풍속(風俗), 황충(蝗蟲)의 출현(出現), 신라와 백제의 홍수시기(洪水時期)와 가뭄시기, 일식(日蝕) 실현지역의 차이(差異), 민속절(民俗節), 교역특산물(交易特産物)을 제대로 보면 우리 역사가 반도역사인지 대륙역사인지 판별이 되는 것이다.
또한 역사의 연속성을 통해 기자·김유신·장보고·최치원 등을 ‘삼국사’ 권46 지역과 한반도 지역에 각기 대입해 보면 한반도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대륙에는 일치되는 상황이다. 또한 삼국사는 ‘삼국사’ 권46지역 기자(箕子)가 살던 서화(西華) 동쪽에서 조선인의 연속성이 입증됨으로 기자가 살던 서화에서 한반도까지 기록으로 보고 바르게 정리하려고 해야한다. 이는 ‘삼국사’ 권46에서 한반도까지 하나로 기록한 ‘삼국사’임을 인식해야 가능한데 역사를 제대로 연구도 검증이나 확인 없이 하다보니 우리 역사는 말이 아니게 잘못돼 있다.
이러한 국가 민족의 역사를 외면하고 중국과 일본의 왜곡되고 조작된 역사를 우리 역사라고 하는 것은 정신나간 자가 할 소리다. 일본학자들도 전후 일본사의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기(記紀)’ 속의 천황(天皇)의 명칭도 잘못되었다 하며 바로 가는데 우리나라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들은 어찌해서 조작된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은 제1대 진무덴노(神武天皇)이후 대대로 통치했다고 했으나 15대 오진 덴노(應神天皇)까지는 실재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대주의학자들은 눈이 멀고 귀가 먹은 맹아(盲啞)인가. 현실에 안주하며 연구는 뒷전인 것 같다. 참으로 못 말리는 사람들이다. 정신이 제대로 된 학자라면 우리의 사서(史書)와 중국사서(史書)를 바로 연구하면 우리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국가와 민족이었는가를 왜 모르겠는지 기가차고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들의 연구가 얼마나 낙후하고 편협되었는지! 바로 연구하고 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우리 역사가 뒤엎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계속)
(以上은 吳在成,‘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93~96(面).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九犂系, 新羅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倭-日本史’. 吳在成 編著, ‘지도로 보는 우리나라역사(東夷疆域圖)’.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김동락, ‘천부경과 문디’ 거시기’. 황순종,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참고(參考)인용(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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