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중국이나 일본이 감히 우리를 지배했다고 운운하는 것은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우리민족은 원시시대에 우랄 알타이에서 경제적·사회적 생활조건을 찾아 동방의 해가 돋는 곳으로 이동했다. 이를 본 고대 중국인은 양곡(暘谷)이라고 칭할 만큼 해 돋는 동방에서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보고 즐겼다. 우리 선조들은 이 ‘해의 신화’를 갖고 나라이름을 조선(朝鮮)이라 칭하고 고려(高麗)라고 칭했다. 조선은 아침에 해 뜨는 조일(朝日)이 선명하다고 하는 뜻이고, 고려는 하늘의 해(天日)와 같이 높다는 뜻이 아니던가. 농경시대에는 농축생활에 힘쓰므로 계(鷄=닭)를 많이 양육했다. 그래서 계(鷄)의 신화를 갖은 나라의 이름을 계귀(鷄貴)라 하고 계림(鷄林)이라고 칭했다.
고유한 문화사상 창조한 한민족(韓民族)
고조선에는 지구상 타에 없는 진단(震檀)이 생산되므로 진단(震檀)을 존중했다. 진단(震檀)은 인삼의 별명이다. 인삼에서 신선사상이 발생해 또한 신선국(神仙國)이라고 칭했다. 삼국유사에 한민족은 천신의 피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고서 산해경(山海經)에 한민족은 천신(天神)의 양육을 받는다는 기록이 있다. 또 중국 고서 독단(獨斷)에 한민족(韓民族)은 천신(天神)·지신(地神)의 피를 받았다는 기록 역시 있다. 그러면 한국에 천신의 피를 받았다는 천민사상(天民思想)이 있는 것을 부정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중국사기(史記)에는 한민족(韓民族)이 최초로 철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따라서 오늘의 한민족(韓民族)이 인류 최초로 철활자를 만든 사실이 판명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같이 한국에 물질적 발명을 중시하는 중물사상(重物思想)이 있는 것을 부정 할 수 없다. 한민족(韓民族)은 다른 민족과는 특이하게 인간사상(人間思想), 천민사상(天民思想), 중물사상(重物思想) 등 3대사상을 존중했다. 이는 한민족(韓民族)의 고유한 문화사상이요, 이 문화 사상이 경탄할 위대한 역사를 창조한 원동력이었다. 즉, 인간사상(人間思想)은 인화단결을 이룩하고, 천민사상(天民思想)은 자존독립(自存獨立)의 정신을 북돋우고, 중물사상(重物思想)은 경이적(驚異的)인 기술을 발견케 했다. 전 국민이 총화단결하면서 자존독립의 정신이 강열하고 경이적인 기술을 발견한 민족이 경탄할 역사를 창조한 것은 당연하다고 최인(崔仁)선생은 ‘한국학 강의’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 3대사상이 조선조에 와서 말살당했다. 인간사상(人間思想)을 말살하므로 인화단결(人和團結)을 이룩하지 못하고 도리어 사색당쟁에 열중해 분열·반목하고, 천민사상(天民思想)을 말살하므로 자주독립의 정신이 침소돼 중국을 대국 내지 조국인양 받들었다. 그리고 서구의 물질문명을 반대했다. 그러면서 반목을 일삼고 이민족(異民族)에 예속되는 노예사상을 존중하고 근대화의 물질문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했다. 이런 민족이 구렁텅이에 떨어질 것은 당연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을 견지하지 못하고 한민족(韓民族)의 위대한 사상을 말살함으로서 비탄한 역사로 타락한 것이다. 천민(天民)으로 자처하는 조선(祖先)이 살던 이 강토가 중국을 섬기는 자원(自願, 스스로 원하는) 반식민지(半植民地)로 변하고 끝내 대한제국에 와서는 일본에 강제 완전식민지로 전락하게 됐던 것이다. 우리의 자주사상을 견지하지 못하고 인간을 사랑하던 군자국이 영일(寧日) 없는 당쟁으로 소국(小國)·망국(亡國)으로 전락된 원인이 오늘의 식민사관(植民史觀) 때문이었다. 이 같은 외래 사대사상(事大思想)에 구걸하는 병폐는 오늘날에도 잔존해 있다. 외래사상, 사대사상에 구걸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고유한 문화사상이 없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고대부터 자랑스러운 우리의 고유사상이 있었다.
화랑도의 본질도 인간 사상에서 나왔다
신라의 화랑도 사상은 고려시대에도 전 국민에게 ‘의무교육’으로 실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보면 우리 고유한 문화사상이 계승·발전한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 화랑도의 기반은 신선사상이요, 화랑도의 본질은 인간사상이라 기록하고 있다. 또한 단군이 신선(神仙)이요, 단군시대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제창한 것은 이미 단군시대에 고유한 문화사상이 있었다는 것을 웅변한다고 하겠다. 조선시대에 최수운(崔水雲)이 유난히 신선(神仙)을 자주 말하고 인본주의(人本主義)를 제창했다. 조선조(朝鮮朝)에도 고유한 문화사상의 여류(餘流)가 잠재적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부정 할 수 없다. 즉, 화랑도의 화(花)는 단군시대에 싹이 트고 삼국시대에 꽃이 피고 고려시대에 그 꽃이 찬란해졌으며 조선조에 그 꽃이 시든 것이다.
한국의 고유사상은 단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5000여 년 동안 끊이지 않고 계승, 성쇠(盛衰)했다. 이 같이 5000여 년 동안 끊이지 않고 계승한 것은 그 사상에 깊은 철리(哲理)가 있고 튼튼한 생명력이 있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이 침체하고 쇠퇴한 것은 어느 시대에나 자주성이 없고 제 것을 소중한줄 모르는데서 기인한다. 조선조에서 어떠한 사대주의가 성행했는지 잠시 살펴보고 가려 한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얼빠진 말들을 하고 있음을 보고자 한다.
사대주의가 우리사상을 잠식시켰다
예컨대, 한말의 대학자요 의병장이라 칭하는 유인석(柳麟錫)은 의암집(毅菴集)二十六, 宇宙問答)에서 “중국은 세계의 대종(大宗)이요 천지의 중심이다. 조선은 중국을 천(天)으로 받들어야 한다. 내가 중국을 존중하는 것은 자의가 아니요. 우리 동방 모든 선현들이 심히 중국을 존중했다. 그러므로 첫째 중국을 존중하고 다음에 조선을 위해야 한다. 즉, 조선보다 먼저 중국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단군이 그 아들을 하우씨(夏禹氏)의 도산회의(途山會議)에 보내 중국을 섬겼다. 그러면 단군의 뜻을 받들어 중국을 섬겨야 한다”고 했다. 유인석(柳麟錫)이 말한 그대로 조선시대의 소위 명현(名賢)이라는 사람들은 다 중국을 천(天)으로 받들었다.
중국정부를 천조(天朝)라 존칭하고 중국 사신을 천사(天使)라 존칭하며 중국장성(中國將星)을 천장(天將)이라고 했다. 그뿐인가. 청구비사(靑邱秘史一卷一面)에 보면 중국정부를 천(天)으로 받드는 임금은 중국을 등지고 앉을 수 없었다. 중국을 등지고 앉는 것은 천(天)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또한 조선조에는 천제(天祭)를 거행하지 못했다. 중국의 천자(天子)가 천제(天祭)를 거행하는 것이요, 조선은 중국을 섬기는 나라임으로 감히 천제(天祭)를 거행할 수 없다고 했다.(조선왕조실록 태종14년 5월 條). 그리고 조선조의 군주는 소위 황단(皇壇)을 설치하고 시시로 북으로 중국을 향해 절을 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단군대(檀君臺), 사선정(四仙亭)을 철거하고 마을마다 공자묘(孔子廟)와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묘(關羽廟)를 세웠다.
그리고 실학파의 요인(要人)인 박지원(朴趾源)과 관련해 연암집(燕岩集(卷之十三, 別集, 熱河日記 行在雜錄)에 보면 박지원(朴趾源)은 “상국인 명(明)나라가 소국인 조선에 주는 물건은 비록 털끝만한 미물이라도 천신(天神)이 주는 것과 같아서 영광이 전국에 움직이고 경상(慶祥)이 만대에 미치었다. 명나라 천자의 유시를 받을 때에 몇 줄 되지 아니하는 짤막한 서찰이라도 하늘에 있는 성운(星雲)과 같이 높이었고, 우레 소리를 듣는 것같이 조심했고, 태한(太旱)에 감우(甘雨)와 같이 감사히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선대로부터 중국천자의 명령을 받아 왔다. 그리하여 중국의 북경을 우리 서울이라 부르고 중국정부를 천조(天朝)라 부르고 아녀자까지 상국인 명나라를 천(天)이라 칭하고 존중했다”고 했다.
연암집(燕岩集(卷之十三, 別集, 熱河日記 行在雜錄) 박지원(朴趾源)은 다시 “우리나라가 중국을 존중하는 것은 천성적이다. 우리나라는 몇 천년동안 중국의 국경지대를 침범한 일이 없고 수당(隨唐)의 명령을 거역한 자는 고구려요 고려가 아니다. 왕건태조가 고려를 세우기 전에 이미 고려라는 명칭이 있었는데 고구려와 고려를 혼동하니 한심하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신라가 먼저 중국문화를 수입하여 고유한 이속(夷俗)을 개혁했다. 중국고서 왕제(王制)에 동방민족이 인(仁)하다함은 신라가 중국화(中國化)한 것을 가르친 것이다. 고려가 신라를 계승해 지성으로 중국을 존중했다”고 했다. 이런 자주성이 없고 중국이 듣기 좋게 노예근성의 말을 늘어놓은 사대주의 인간을 명현(名賢)으로 받드는 한, 우리의 올바른 역사관이나 사상은 종속(從屬)될 수밖에 없었다. 이 분들의 자손들은 섭섭할지 모르나 우리의 정체성을 바로 잡고 가야 한다.
위선자들의 명현(名賢) 추대는 잘못된 것이다
또, 박지원(朴趾源)은 연암집(燕岩集 忘羊錄)에 보면 “꿈속에 중국의 훌륭한 문장을 보아도 손을 씻고 읽었다”고 했다. 그는 “중국 인사(人士)가 고려의 충성을 모르고 도리어 고려가 거란(契丹)에 정보를 제공키 위하여 중국에 조공한다고 의심하였으니 실로 원통한 일이다. 고려가 거란(契丹)의 압박에 의하여 중국에 조공을 못한 때가 있었으나 험하고 먼 만리해로에 만사(萬死)의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에 조공한 것은 속국의 신하로서 사대의 의무를 수행 한 것이요 감히 대국인 중국에 대해 어떠한 이익을 도모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박지원(朴趾源) 말고도 소위 조선시대 사가(史家)라고 칭하는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 第一, 上)에 “기자(箕子)같은 성인(聖人)이 한국에 온 것은 신이 도운 것이다”라고 말하고 먼저 기자를 내세운 뒤 다음에 단군(檀君)을 기록해 기자를 기점으로 한국사를 엮어 놓았다. 이런 기록들을 ‘조선사편수회’는 좋은 사료(史料)로 이용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사대주의 선비로 인해 중국을 천(天)으로 받드는 사대사상이 선 기자(先 箕子), 후 단군(後 檀君)의 자학적 역사를 잉태케 했다. 더 한심한 것은 조선조 21대 영조대왕이 모든 신하에게 강화도 수비에 대한 사정을 물으니 경기도 감사 유엄(柳儼)이 “우리나라는 외적의 침략을 걱정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몽고가 침입하면 지금 청나라를 상국으로 섬김과 같은 사대의 예로서 받들어 모시고 서달(西韃)이 침입하면 또한 그와 같은 사대의 예로서 받들어 모시면 무사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조선왕조실록 영조19년 8월조(條). 중국을 하늘로 받드는 이런 자들의 사대사상은 민족의식을 완전히 말살해 이민족(異民族)에게 영구히 노예가 되기를 자원하는 망국론이다. 이러한 자들로 인해 외침의 피해를 면 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중국을 하늘로 받드는 조선시대의 문인, 사가(史家)들은 우리민족이 본래 중국의 노예요 또한 노예가 돼야 한다는 식민지사관을 조작하고 국민을 가르쳤다. 이런 국민교육을 시행한 결과 조선조는 이민족(異民族)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사상적 공황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이런 자들을 명현(名賢)이라고 받드는 것은 우리의 수치요, 민족혼을 말살하는 행위다.
분명한 것은 내외의 문헌을 다시 고증하면 지금까지 위에서 논해 온 바와 같이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도리어 한국을 천(天)으로 받드는 천민사상(天民思想)의 민족이었다. 우리 선조들 천민사상은 고대부터 있었고 또한 인간을 존중하는 인간사상(人間事思想)이 있었으며 물질을 존중하는 중물사상(重物思想)이 있었다. 3대사상을 발견한 한민족(韓民族)은 문화로서 중국과 기타민족을 지도하고 무력으로서도 중국과 기타 민족을 압도하며 또한 지배했다. 외국 학자들도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부러워하는데 조선조에 와서 신라의 김부식(金富軾)과 같은 자가 중국에 요공(要公)을 하느라 역사와 민족혼을 팔면서 까지 무사안일을 도모한 사대주의는 결국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던 적이 없는 우리민족을 왜적에게 강탈 당하고 지배 당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우리사상과 민족 혼 민족정기 되살려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가셨다가 순국한 이준(李儁)선생은 ‘한국의 혼(魂)은 독립자유의 혼이요, 동족애호의 혼이요, 건설 개척의 혼이요, 세계화의 혼이요, 살신성인의 혼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이비 명현(名賢)들에 의해 민족문화의 전통과 자주성은 찾아 볼 수 없도록 그르치게 가르치고 국민을 사대주의에 절이게 했다. 우리의 역사와 사상과 민족정기를 헌신짝같이 버리고 나라마저 잃는 비극을 맞은 우리는 아직도 이 사대주의적인 사람들에 의해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정신상황은 여전히 불투명한 지도체제로 행정만능에 가치관 변질에 따른 흑백논리가 판을 치고 있다. 더불어 종(從)적인 연결은 있으나 횡(橫)적인 연결이나 삶이 없어 애국애족의 정신은 약하고 정치도 지방과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분열양상을 자아내고 있다. 이는 사대주의 선비들과 오늘에 와서도 이들과 다름없는 사대주의 학노(學奴)에 의해 더해지고 있다. 중국과 일본에 아부하면서 연구는 뒷전으로 한 채 일신의 안위만을 위한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가치관의 변질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 근원은 자주 독립의 주체성이 없는, 소위 선비의 잘못된 중화사상과 일제 총독부 ‘조선사편수회’가 발간한 33권의 조선역사를 통해서였다. 이를 배경으로 한 왜곡된 역사로 한민족(韓民族)의 기를 꺾고, 열등의식을 키우고, 패배의식을 심은 결과가 이런 사태를 가져온 것임을 우리 모두가 자각해야 한다. 조선조의 사대주의와 지금의 사이비 학자들은 변하지 않았다. 구태를 못 벗고 있다. 민족사관(民族史觀)을 토대로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지 못한 결과 우리의 전통문화 사상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대주의 사상이 우리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인간과 그 정신의 가치가 본연의 빛을 잃은 소치다. 급격한 사회변동과 외래문화의 변용과정에 있어서 전통적인 우리 정신과 사상은 경시되고 있음이다. 아울러 민족문화의 자주성마저 손상을 끼치며 송두리째 우리의 고유문화사상을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 왔다. 그 결과 우리는 ‘민족정기’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 우리 것을 바로 찾고 간직하고 가야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의 정신적 가치관을 바로 찾지 못하고 우리 조상의 자랑스러운 역사전통과 가치관을 확립하지 않으면 사대주의 역사와 사대주의 사상에서 벗어날 수 없고 역사도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국가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어느 사회나 자주성과 책임성이 없으면 그 조직은 와해되기 마련이다. 로마의 멸망은 외침이 아니라 내부의 병폐에 있었다. 민족혼마저 잃어버린 오늘 대한민국 학자들의 자화상은 우리 지성인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허구적인 지식으로 인해 지식의 공동화(空洞化)와 가치체계의 혼미(昏迷)함을 겪는 모습이다. 양심의 자유나 독립이 없이 타성으로 움직이는 군중들은 연대감마저 찾을 수 없고, 불신감과 이기심이 팽배하고, 도의심 실종을 가져 왔다. 그 영향으로 한탕주의가 만연된 상황이 작금의 우리 현실이다. 때문에 먼저 지도급 사이비학자부터 달라져야 한다. 옛말에 “선비는 이익 때문에 행동을 옮기지 않으며 걱정 때문에 의지를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 학자다운 품위를 지키고 우리의 민족혼을 되살리고 민족정기를 바로 하는 역사를 제대로 찾고 가는 일부터 해야 한다. 우리 모두 역시 나서야 할 때라고 사료된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우리 고대사를 연구한 최태영 선생과 최인 선생의 연구한 글들을 많이 인용·참조 했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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