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지나(支那;中國)의 잔혹(殘酷)한 살육(殺戮)과 학살(虐殺)로 인간 존엄과 생명의 존엄, 인간다운 삶의 생존은 없었다고 했는데 잔혹한 살육과 학살은 지나(支那;中國)의 역사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계 어느 곳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다 있었다.
몽골제국의 칭기즈칸에 의한 중앙아시아 제민족(諸民族)의 대살육, 러시아제국에 의한 이민족학살(異民族虐殺)과 잔악행위(殘惡行爲), 영국의 아일랜드인의 대살육, 스페인제국에 의한 잉카제국의 말살, 아메리카인에 의한 인디언 살육, 19세기에 와서는 스탈린에 의한 700만~2000만, 히틀러에 의한 이스라엘 600만 유대인 학살, 폴포트에 의한 200만 살해, 아프리카 종족의 대립에 의한 100만이 넘는 학살이 있었다.
이외에 여성(女性)에 의한 잔인한 살해도 지나(支那;中國) 역사에서 천인공노할 살육의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한 예를 든다면 전한(前漢)의 여후(呂后), 당(唐)의 측천무후(則天武后), 청(淸)의 서태후(西太后)의 이름은 빼놓을 수가 없으나 한 예만 보겠다.
전한(前漢)의 고조(高祖;유방(劉邦)의 처(妻)인 여후(呂后)는 유방(劉邦)을 보좌한 공신중의 공신(功臣)이라 말해지는 맹장(猛將) 한신(韓信)을 간계(奸計)를 써서 유무를 따지지 않고 참살하고 같은 공신인 팽월(彭越)도 반역의 여지가 있다고 해서 처형했다.
그런데 여후(呂后)의 이름이 역사(歷史)에 알려지게 된 것은 부군(夫君)인 고조(高祖)의 사후(死後) 왕의 총애(寵愛)를 받던 척부인(戚夫人)에 대한 잔혹(殘酷)한 처사(處事)다.
고조(高祖)에 대한 장례(葬禮)가 끝나자마자 여후(呂后)는 척부인(戚夫人)을 붙잡아다가 후궁(後宮)의 뢰옥(牢獄)에 감금한 후 손과 발을 절단하고 눈알을 빼고 귀를 불로 태워서 자르고 독약을 가지고 노도를 못 쓰게 하고 그래도 죽지 않자 화장실에 떨어트려 인간의 변을 먹는 돼지와 같이 죽을 때까지 살게 해 ‘사람돼지’라고 부르게 했다.
이것은 지나(支那;中國)의 여성에 의한 잔인한 앙갚음의 한 면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전한(前漢)의 여후(呂后)는 당(唐)의 측천무후(則天武后)며, 청(淸)의 서태후(西太后)의 행태에서도 볼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함이 여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잔혹(殘酷)한 살육(殺戮)과 인간존엄과 생명의 존엄, 인간다운 인간미를 찾을 수 없는 야만적인 행태로 지나(支那;中國)의 잔혹한 역사에서 남성의 실제정치(實際政治)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한편 남성에 의한 살육은 오래전부터 동이(東夷)의 지배를 받아온 지나(支那;中國)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자 가혹하게 밀어낸 역사에서도 볼 수가 있다.
동주시대(東周時代)부터 예맥(銳麥;濊貊)등 동이(東夷)의 지배를 받아온 그들은 진(秦), 한(漢), 수(隨), 당(唐), 송(宋), 원(元), 명(明), 청(淸)을 세운 집권한 왕들이 동이(東夷)나라의 국력(國力)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혹독하게 써온 것을 볼 수 있다.
오늘은 지면관계로 다 쓰지 못한 지나(支那;中國)가 역사를 숨기고 있으면서 우리의 문물제도가 그들에게 넓게 전수(傳授)된 우리역사의 이모저모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지나(支那;中國)는 우리 역사를 철저히 숨겼다
지나(支那;中國)와 일본역사를 연구해 보면 그들은 우리 역사를 거꾸로 말하고 있음을 본다. 그들이 얼마나 허구역사를 말하고 있는지 잘 알게 된다. 그들은 모든 문물제도가 지나(支那;中國)에서 나왔다고 조작했다. 고대 모든 문물제도 우리에게서 배웠다.
그것은 천자(天子), 황제(皇帝), 역학(易學), 홍범구주(洪範九疇), 군사학(軍事學), 조공제도(朝貢制度), 환관제도(宦官制度), 기미정책(覊縻政策) 등 만물제도(萬物制度)가 다 우리에게서 배웠는데도 마치 지나(支那;中國)가 창조한 것 같이 거꾸로 말하고 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인류사상 최초에 등장한 문화민족(文化民族)임에도 이를 모르는데서 자부심(自負心)을 갖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자학사관자(自虐史觀者)들의 잘못된 역사인식(歷史認識)으로 온 국민이 이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오늘과 같은 지리멸렬(支離滅裂)한 우리의 사회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슬픈 일이다.
우리는 그들의 말하는 그런 민족이 아니다. 우리는 지나문화(支那;中國文化)를 창설한 자인 것에 자부심(自負心)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지나(支那;中國) 문화를 창설(創設)한 자는 요(堯)와 순(舜)이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지나(支那;中國) 문화(文化)를 창설한 자(者)는 요(堯)도 순(舜)도 아니고 바로 우리 선조(先祖)들인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지나(支那;中國) 사학계(史學界) 제일인자(第一人者)인 사마온공(司馬溫公)과 지나(支那;中國) 문화의 대종사(大宗師)인 공자(孔子)의 견해(見解)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사마온공(司馬溫公)은 ‘계고록(稽古錄)’에서 요(堯)에 대해 도당씨(陶唐氏)라 간단히 언급하고 순(舜)에 대해 ‘유우씨 상(有虞氏上)’ ‘유우씨 하(有虞氏下)’에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또 공자는 ‘계고록(稽古錄 卷下 離婁章)’에서 순(舜)같은 대성인(大聖人)은 후세(後世)에도 다시 출생할 수 없는데 이가 동이인(東夷人)이라 말하고 있다.
사기(史記 卷一, 五帝本紀第一(註, 周處風土記)에 순(舜)은 동이인(東夷人)이라 기록하였고 공자(孔子)도 스스로 은인(殷人)이라 말하고 사기(史記卷四十七, 공자세가(孔子世家卷 第十七)에도 공자(孔子)가 예기단궁편(禮記檀弓篇)에 자기 스스로 은인(殷人)이라 했다고 한다. 이같이 중요 인물들이 동이인(東夷人)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지나(支那;中國)의 사가(史家)인 임해상(林海祥)과 문인(文人)인 전사년(傳斯年)도 공자(孔子)가 은인동이설(殷人東夷說)을 주장하고 있다고 했다. 이는 순(舜)과 공자(孔子)가 지나(支那;中國) 사람이 아니라. 동이인(東夷人)임을 말하고 있다.
지나(支那;中國) 문물제도는 우리에게서 배웠다
지나(支那;中國)는 우리가 선진문명국(先進文明國)으로서 예로부터 지나(支那;中國)에게 천자(天子), 황제(皇帝), 역학(易學), 홍범구주(洪範九疇), 군사학(軍事學), 조공제도(朝貢制度), 환관제도(宦官制度)등 만물제도(萬物制度)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서 배웠는데 지나(支那;中國)에서는 자기들이 처음부터 다 한 것 같이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상고시대나 고대 삼국시대도 우리가 지나(支那;中國)와 왜(倭;(日本)를 정복하고 지배한 본래의 역사를 바로 알고 말해야 하고 일제강점(日帝强占)시대 군국주의시대(軍國主義時代)의 역사교육에서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고 가야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자국민의 침략적 사기를 높이기 위해 우리 민족의 정신을 좀먹게 한 역사가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나! 이제는 민족적 자각(自覺)과 자주성과 자존심(自尊心)을 북돋고 위대한 역사와 한국사상(韓國思想)의 중핵(中核)을 재확립해야 한다.
이미 부분적으로 기술한 바 있는데 고대 지나(支那;中國)는 우리의 문화사상(文化思想) 뿐만 아니라 2000년 동안 고시(楛矢), 석족(石鏃)을 수입하고 당고종(唐高宗)은 신라의 쇠뇌를 배우려고 신라의 장인을 데려다가 전수받으려 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로, 지나(支那;中國)는 문화 사상뿐만 아니라 물질문명도 우리에게서 수입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북사(北史) 주역(周易)에서도 재확인 된다. 북사(北史)에 ‘동이에서 수입한 것은 궁시(弓矢)뿐 아니라 기타 문화도 수입한다고 기록하였다.(北史 卷94 末尾). 지나(支那;中國)문화의 중핵(中核)인 황제제도(皇帝制度)가 동방한국에서 창조되었다고 했다. 만(萬)가지 문물제도가 다 동방한국에서 창조되었다고 한 것이다.
이 북사(北史)는 당태종(唐太宗)정관(貞觀)원년(元年)~고종(高宗) 현경(顯慶) 4년간(627~639)에 이연수(李延壽)가 사찬(私撰)한 북조(北朝;(北魏, 齊, 周, 隨) 233년간(386~618)의 통사(通史), 본기(本紀) 12, 열전(列傳) 88 총100권(卷)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군주제도(君主制度)와 관제(官制)도 우리에게서 배웠다고 하였다. 논어(論語)에도 기술되어있다(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無也)(論語 卷之三 八佾第三). 공자가 28세 때, 동이족인 담자(郯子) 선생에게 가서 천자(天子)의 관제(官制)를 배우고 옛날부터 천자가 관제(官制)를 잃으면 사이(四夷)에게 가서 배운다는 말이 있었는데 과연 그러한 것이다.
여기서 사이(四夷)란 우리 동이족을 말하는 것이다. 한(漢)나라 채옹(蔡邕)이 저술한 독단(獨斷 卷上)에 [天子夷狄之小稱 父天母地 稱天子)]라 하였다. 즉, 천자(天子)라는 칭호(稱號)는 이적(夷狄)이 창조한 것이요 이적(夷狄)은 천신(天神) 지신(地神)의 피를 받은 민족으로 자처함으로 천자(天子)라는 칭호(稱號)를 창조(創造)하였다고 한 것이다. (以上은 崔仁 , ‘韓國學講義’ 44面~54面을 參照하고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지나(支那;中國)에 전 왕조 유품 전무한 이유
어느 나라나 다소 차이는 있으나 전 왕조를 무너뜨린 신왕조는 전 왕조에 소속하는 모든 문물(文物)을 남기지 않고 없애버리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지나(支那;中國)에서도 진(秦)나라 때부터 전왕조(前王朝)에 소속하는 인간들을 철저히 살육을 하는데 그치지 않고 건물이나 비품(備品) 미술품, 미술품, 그리고 분묘(墳墓)에 이르기 까지 전왕조의 영향이나 보호를 받고 있는 모든 것을 파괴의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본다.
왜 이런가하면 전왕조(前王朝)의 사람이나 물건을 부정(否定)함에 의해서 신왕조(新王朝)와 구왕조(舊王朝)의 다름을 신민(臣民)에 알리는 것이야 말로 지배상(支配上)의 필수조건(必須條件)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오늘에도 전근대적(前近代的)인 집권자(執權者)에 의해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고대 지나(支那;中國)에 있어서는 사원(寺院)이나 역사적 건물도 파괴되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위시해서 건조물(建造物)이 겨우 파괴를 면(免)하고 있는 정도이다. 이러한 결과 어느 나라에서도 각종의 민요(民謠)가 있으나 유독 지나(支那;中國)에서는 벼를 심는 앙가(秧歌) 밖에 남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와 너무 대조를 이룬다.
40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지나(支那;中國)에는 900년 전의 송(宋)나라 시대부터 불렀다는 앙가(秧歌)도 하나 밖에 남지 않고 있다는 것은 여기서도 지나(支那;中國)가 전왕조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잔혹(殘酷)한 살육(殺戮)과 학살(虐殺)로 인한 결과가 잔혹(殘酷)했던가를 말해주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우수한 악기주자(樂器奏者)나 가수에 있어서도 왕조(王朝)가 멸망할 때는 죽여 버리든가 들에 도망가 숨어버려서 두 번 다시 사람들 앞에서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분위기가 이런 결과를 낳은 결과로 보고 있다.
한편 지나(支那;中國)에서 일본(日本)에 전해 졌다는 아악(雅樂)은 일본의 문학가(文學家)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에 의하면 당(唐)의 시대에 궁중(宮中)에서 연주(演奏)된 위구르(回鶻)족의 음악으로서 지나(支那;中國) 고래(古來)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러한 지나(支那;中國)의 상황은 전왕조(前王朝)의 유품(遺品)이나 유물(遺物) 등도 수난(受難)을 받아 남아 있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지나(支那;中國)에서는 우리가 중원대륙에 있었던 찬란한 문명과 문화를 숨기거나 없애는 것은 이를 말해준다.
더욱이 중원(中原)의 본토와 타이완(臺灣)등의 국립도서관(國立圖書館)에서 우리나라 사람과 외국인(外國人)에 우리 삼국시대의 사서(史書;(圖書)를 숨기며 보여주지 않은 것은 지금도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歪曲)하고 있는 것은 이를 입증(立證)해 주는 것이다. (以上은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66面~68面 參照,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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