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중국의 천(天)에 대한 사상의 원류는 한국에서 시작
중국의 상고시대는 당우시대(唐虞時代)의 요전(堯典), 순전(舜典), 대우모(大禹謨), 고도모(皐陶謨)에 천(天)사상으로부터 춘추전국시대에는 공자(孔子), 자사(子思), 순자(荀子), 묵자(墨子), 노자(老子), 장자(莊子) 등의 천 사상 관한 원류가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천(天)의 사상에서 나왔다. 또한 중세의 동중서(董仲舒), 왕충(王充)과 근세의 주렴계(周濂溪), 소강절(邵康節), 장횡거(張橫 渠), 정도면(程明道), 정이천왕(程伊川王), 이정문인((二程門人), 주자(朱子), 융상산(陸象山), 왕양명(王陽明)의 천(天)사상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 상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어느 민족에게나 공통된 현상인 자연신을 숭배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다신교적 견지에서 천을 보았으나 점차 문명이 발달하면서 천(天)에 대해 분명한 정의를 내리기 시작했다. 상고시대의 당우시대(唐虞時代)는 성군과 현상이 많이 배출돼 천(天)에 대한 관념도 명확히 부각됐다. 인간사회의 정치·도덕은 모두 천(天)이 부여한 것으로 천(天)의 시청(視聽)은 인간의 시청(視聽)과 상통한다는 긴밀한 천인관계(天人關係)가 그것이다. 천(天)은 이처럼 절대적 권위의 존재로 경앙과 숭배의 대상이 됐다.
또한 하은(夏殷)과 은주(殷周)의 시대에는 그 왕조교체에 있어 혁명적 과정을 거쳐 그들이 표방한 천(天)의 개념 또한 한층 더 명백해 졌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천(天)은 유덕자를 보우하고 행악자를 징계하며 공평무사 해 어떤 특정 개인이나 왕조를 편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그들은 일상생활에 있어 사회적 부조리나 개인의 고민을 토로할 때는 언제나 천(天)을 향해 호소했다. 이를 보면 그들의 마음속에 경천사상(敬天思想)이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공자는 그의 전 생애가 천의(天意)에 부합되도록 행했던 사실이 논어에 나타난 그의 언행을 통해 알 수 있다. 또 공자의 전통을 계승한 맹자도 철저한 천신봉자(天神奉者)로서 그가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사방으로 주유한 것도 천(天)이 자신에게 부여한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려는 의도에서 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묵자(墨子)는 그의 정치이론에서 유가(儒家)와는 그 주장을 달리하고 있으나 그도 천(天)의 본질을 사랑으로 규정하고 그런 무차별적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런 사실을 보면 그의 천관(天觀)은 정열적 종교 신앙과 방불하게 한 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묵자는 천(天) 사상을 기본으로 해 시폐 과정을 위하여 많은 의견을 발표했으나 그 주장들이 지나치게 과격하므로 묵학(墨學)은 그 후 큰 발전을 못했다. 한대(漢代)에 이르러 유가는 종래의 천관(天觀)을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과 결부시켜 인체조직과 자연현상의 유사점을 들어 물질적 천인합일론(天人合一論)을 전개했다. 이어 그 말류는 풍수도참설(風水圖讒說) 등에 까지 경도(傾倒)돼 천(天)의 자연 현상에 순응하는 것으로서 제일의를 삼았다. 이렇듯 천(天)이 낳은 만물에 대한 연구를 철저히 전개해 자연을 인간의 후생복리에 이바지 하도록 하지 못한 감이 있다. 그러나 중국은 천(天)의 사상을 이어 받아 크게 발전시켰으며 군사학과 주역철학, 종교 등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오늘은 이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군사학과 주역철학도 한국에서 가져 간 것
중국과 일본은 우리 역사를 왜곡하면서도 천자(天子)의 문물제도가 한국에서 창조됐다고 증언 하고 있음을 본다. 고기(古記)에 천신(天神) 황인(桓因)이 한국 땅을 중심으로 인류를 지도한다는 내용과 천신(天神)의 피를 받았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재래 사대사가가 이 신화를 무시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문헌들은 인류의 대표라 칭하는 천자(天子)가 한국에서 창조됐다고 밝히면서 동시에 천신의 피를 받았다고 칭하는 천자(天子)의 문물제도가 한국에서 창조됐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천자(天子)에 대해 후대 거란과 일본이 천황을 칭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 한국사상을 직수입한 것으로 그들이 독자적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군사학도 한국에서 수입하고 있다. 그것은 중국 5천년 동안 ‘중국병가’(中國兵家)의 시조는 강태공(姜太公)이고 강태공(姜太公)의 군사철학이 후세에 전파됐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사기(史記)에 강태공(姜太公)은 동이(東夷)의 사(士)라고 했다.(史記32, 齊太公 世家第二) 따라서 중국의 군사학도 한국에서 수입됐다는 견해에 이의(異議)가 있을 수 없다.
주역철학(周易哲學)과 홍범구주(洪範九疇)도 한국에서 간 것이다. 우리는 황하문명보다도 1000년 이상 앞선 요하문명 발굴에서 하늘 빛깔의 옥이 나온 것을 볼 수 있다. 이 옥을 갖지 않으면 서전고명편(書傳顧命篇)에 ‘대옥(大玉), 이옥(夷玉), 천구(天球), 하도(河圖)가 동서(東序)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상서금고문주소(尙書今古文注䟽 卷二十五)에 ‘대옥(大玉), 이옥(夷玉)은 제고양씨(帝高陽氏)의 천구(天球)라는 설(說)이 있다’고 한 내용이 있다. 또한 이옥(夷玉)은 동이(東夷)의 미옥(美玉)이요 옥속(玉屬)이라고 한다. 또한 대옥(大玉)은 환산(華山)의 구(球)요, 이옥(夷玉)은 동북방의 옥속(玉屬)이요, 천구(天球)는 옹주(雍州)에서 생산되는 옥이다. 이들 옥속이 하늘 빛 같은 자는 가공하지 아니한 소재(素材)이므로 예기禮器)로 사용치 못하는데 이를 하도(河圖)라고 칭한다. 하도(河圖)가 나타나니 복희씨(伏羲氏)가 이를 보고 팔괘(八卦)를 그렸다. 한우씨(夏禺氏)의 낙서(洛書)도 동쪽에 있다. 동이(東夷)의 옥을 일방 제고양씨(帝高陽氏)의 하도(河圖)라고 칭하고 하도낙서(河圖洛書)라고 칭한다. 즉, 한국에서 생상되는 것을 하도낙서(河圖洛書)라 칭한다고 한 것이다.
요하문명(遼河文明) 발굴현장의 옥도 한민족(韓民族)의 것
요하문명(遼河文明)이 황하문명(黃河文明)보다 1000년 이상 먼저 나온데 중국은 당황하는 이유가 있다. 이 요하문명이나 홍산문명(紅山文明)이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문명이라는데 토를 달 수 없는 데서이다. 요하문명(遼河文明)의 발굴에서 5000년 전 여신상(女神像)과 함께 나온 옥(玉)이 나온다. 5500여 년 전 중국에는 볼 수 없는 우리 적석총(赤石冢) 여신묘(女神墓)에는 크기가 다른 여신상이 있고 거기에서는 귀한 옥이 나왔다. 이는 황하문명보다 1000년이 앞선 문명과 함께 강력한 통치자가 있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역사의 말살을 기도하는 중국으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접근을 철저히 막고 있음도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들은 당황한 나머지 문명다원론을 들고 궁색한 이론을 펴며 자기들 조상들과 싸워온 치우황제(蚩尤黃帝)와 염제(炎帝)를 시조로 삼고 있는 것이다. 적석총은 한반도와 제주도 중국산동반도와 일본까지 퍼져 있는 북방문화계역이다. 만리장성 앞 연산은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이다. 이곳에 거대한 적석총이 이집트 피라미드 보다 천년 앞서 세워진 것이다. 이곳에 우리의 장군총과 같은 적석총이 수 천 개가 분포돼 있다. 이 지역은 말 할 것도 없이 우리 고조선의 영역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분명한 것은 중국문명의 시원이 요하문명(遼河文明)에 있는 것과 같이 천(天)의 사상도 한국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주역(周易) 철학(哲學)은 하도(河圖)에서 나오고 천도(天道)라 칭하는 홍범구주(洪範九疇)는 낙서(洛書)에서 나왔다고 한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려는 중국문헌에 이상과 같은 것을 기록한 것을 검토해 보면 주역철학(周易哲學)과 홍범구주(洪範九疇)가 한국에서 창조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언해도 무방하다. 홍범구주(洪範九疇)가 한국에서 창조 된 것은 또 실증(實證)이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은(殷)은 동이족(東夷族)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 허구(虛構)의 기자조선을 조작한 중국이 기자(箕子)를 중국인이라 하나 여기의 기자(箕子)는 동성동명이 아닌 이상 은(殷)의 시조 성탕(成湯)의 16세손으로서 동이족(東夷族)에 속한다. 그런데 서전 홍범장(洪範章)에 기자(箕子)가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주무왕(周武王)에게 전도(傳道)했다고 하고, 그 주(注)에 기자(箕子)가 주 무왕(周 武王)의 신하되는 것은 불가하나 천도(天道)를 전하는 것은 가(可)하다고 했다. 홍범구주(洪範九疇)가 동이(東夷)에 의해 중국에 전한 것은 그 홍범구주(洪範九疇)가 동이족(東夷族)에 의해 창조 된 것을 실증(實證)한다고 하겠다.
동북공정 대응은 실증자료를 갖고 제대로 해야
이러한 고조선문화의 우수성은 70~80년대에 발견되는 요하문명의 소능하 유역의 흥융 문화와 홍산문화 등의 유적발견으로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후안무치하게도 우리역사를 송두리째 바꿔 놓고 있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찬란한 역사를 주객이 전도되는 중국사로 편입시키는 악랄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2002년~5년간 진행했다. 이어 지난 5월 1일에는 425년간 고구려의 수도였던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에 고구려 박물관을 지어 개관하기까지 했다. 중국이 이제는 역사왜곡의 영역을 벗어나 노골적으로 중국인의 역사상식을 바꾸는 단계에 들어가서 공공연히 우리역사와 우리 강역을 왜곡한 것을 들고 나오고 있다. 고구려 영역이던 지금의 연변(延邊) 일대를 고구려 영토에서 제외시키고 이곳을 말갈족(靺鞨族) 영역으로 구분하기까지 하고 있다. 고구려, 발해의 연결고리를 없애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거리낌 없이 감행하며 고구려의 남쪽 영토는 한강유역이라고 하는 등 언어도단은 말로 형용 할 수 없다. 중국은 지금 날강도 짓을 행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감내하기 힘든 일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구하고 있다.
이런데도 우리는 철저한 대응을 하고 있지 않다. 감히 우리역사에 손을 대는 중국만 탓 할 것이 아니라고 본다. 고구려가 천년가까이 나라를 이어가는 동안 중국은 35개의 나라가 사라졌다. 사실이 이와 같음에도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니 기가 막힌다. 역사를 도둑질 하는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그 속성은 변치 않고 있음을 본다. 우리도 동북공정에 맞서 ‘동북아 역사재단’을 만들어 250억 원의 예산을 쓰고 연구한다지만 예산만 낭비만 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반박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재단이라면 존재가치가 없다. 차라리 없애고 새로 재단을 재편성해서 이에 대응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역사를 무시하는 세대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고 작가인 로버트 하인라인은 말하고 있지만 ‘역사는 미래를 내다보는 거울’이라고도 했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한민족(韓民族)의 역사를 잃으면 민족의 미래는 없다’는 각오로 맞서서 우리역사를 지키고 더 발굴해 가야함에도 팔짱을 끼고 있는 형세는 누구를 위한데 있는 것인지 한심하기까지 하다.
이제 우리 정부도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중국과 일본의 고대에서부터 오늘에는 더 심각한 역사 침탈에 대해 과감한 대응을 해야 한다. 우리 연구진의 철저한 연구를 제대로 하도록 메스를 가해 중국과 일본의 역사 침탈에 과감히 대응해야 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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