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찬란한 역사는 800년간 지나(支那:中國)와 일본(日本)이 패배(敗北)와 수치(羞恥)의 거짓 위조(僞造)하고 조작한 역사를 지금도 변함없이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과연 우리역사가 패배(敗北)와 수치(羞恥)의 역사였는가? 필자가 추구(追究)하며 연구해온 결과는 이와는 정반대로 우리나라가 세계시원국(世界始源國)으로 환국(桓國)과 배달(倍達國), 고조선(古朝鮮)과 예맥조선 부여(夫餘), 삼국시대의 고구려(高句麗)·백제·신라·가야 역사가 얼마나 자랑스럽고 찬란한 역사였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일제의 ‘조선사편수회’가 조작한 역사가 얼마나 왜곡(歪曲)되고 허구적이고 기만적인 날조(捏造)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세계가 석기시대라 하는 신석기시대에 우리는 석기 철기를 파괴하는 고시(楛矢), 석족(石鏃)을 발견한 우리는 사방원시민족(四方原始民族)을 정복하고 대국(大國)으로 등극(登極)한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인류 최초의 대국(大國)으로 등장한 우리나라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천자(天子), 황제(皇帝)의 문물제도(文物制度)는 물론 문화(文化)와 문명(文明) 사상(思想)과 군사(軍事)면에서도 추종을 불허하는 선진국으로 인류문명에 크게 공헌한 강한 국가였다.
이는 지나(支那:中國) 정사(正史)와 경전(經典)에 조선 민족의 특징은 인(仁)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라 분명히 기록하고 지나(支那:中國) 문화의 개척자 순(舜)과 지나 문화의 대종사(大宗師) 공자(孔子)가 사이(四夷)가 우리 민족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록하면서 우리를 군자국(君子國)이라 찬양까지 했다.
또한 지나 병가(兵家)의 강태공(姜太公)이 우리 한(韓)족이라 분명히 기록하고 조선(朝鮮)을 대국(大國), 구국(舊國)이라 찬양(讚揚)까지 하고 있는 것은 이를 증명한다. 지나는 고대부터 우리가 창조한 모든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수입하였고 고대 지나의 문물제도는 우리나라 제도를 모방했음을 입증한다.
지나의 유명한 사가(史家) 범엽(范曄)은 공자(孔子)를 가르친 담자(郯子)가 우리 민족이요 공자가 말한 사이(四夷)가 우리 민족이라는 것을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기입하고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도 공자의 말을 기입하고 있다.
오늘은 삼국시대(三國時代) 대륙을 호령한 고구려를 침범한 수나라가 건국해 37년간 존속하면서 30년 동안 고구려원정(高句麗遠征)에 전력을 다 했으나 건국해 40년도 아니되어 패망한 사실은 어떠한 연유에서인가? 살펴보고자 한다.
수제국(隨帝國)은 어떤 나라였나
이들은 북으로부터 남으로 내려와서 육조(六朝)를 연 이들은 지금까지 개발(開發)이 되지 않았던 양자강주변과 강남을 300년 간에 걸쳐서 철저하게 개발해 경제적으로는 북부보다도 부(富)와 재력(財力)을 갖춘 나라를 만들어 냈다.
이 재력이 있음으로 농촌에서는 대지주(大地主)가 발흥(勃興)해 자작농(自作農)은 몰락하는 움직임이 급속히 진행돼 도시(都市)에서는 부호(富豪)나 귀족(貴族)들에 의해서 문예(文藝)·예술(藝術)·사상(思想)·종교(宗敎)·사학(史學) 등의 분야가 크게 발전돼 쇄신(刷新)의 기풍(氣風)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요람기(搖籃期)를 거쳐서 북조(北朝)도 남조(南朝)도 문벌제도(門閥制度)의 막힘을 타개(打開)하고 보다 효율적(效率的)인 남북간교류(南北間交流) 등이 쌍방(雙方)에서 요구(要求)하게 돼 통일(統一)의 기운(氣運)이 높아가고 있었다. 이런 때 양견(楊堅)이 등장한 것이다.
양견은 우선 북방(北方)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었던 돌궐(突厥)을 공격해서 이를 제압(制壓)하고 서기 587년에는 호북(湖北)에서 겨우 명맥(命脈)을 이어오고 있었던 후량(後粱)을 멸(滅)하고 염원(念願)인 지나의 통일을 위해 남조(南朝)의 진(陳) 토벌 군세(軍勢)까지 갖췄다.
이제 문제(文帝)가 된 양견(楊堅)은 남조(南朝)의 진(陳)을 588년 10월 병력(兵力) 52만으로서 진 공격에 들어가 적 10만을 간단히 격파해서 멸(滅)하고 오호(五胡)의 난(亂)이래 280여 년만에 다시 지나를 통일하는 대업(大業)을 이룩했다.
문제와 양견은 서기 589년 수나라를 건국하고 지금까지의 중앙관제(中央官制)와 지방제도(地方制度)를 대폭으로 개혁(改革)함과 동시에 새로운 영토가 된 남조(南朝)의 옛 영토(舊領)에 많은 역인(役人)을 파견(派遣)해야 하는 필요상 과거제도(科擧制度)를 열어 호족(豪族)의 진출을 억제하고 중앙에서 관리등용시험(官吏登用試驗)을 행했다. 그리고 그 합격자(合格者)를 지방관(地方官)에 임명(任命)했다.
그런데 604년에 둘째 아들인 광(廣)이 제2대 왕 양제(煬帝:569년~618년)가 되니 수는 내치외고(內治外交) 양면(兩面)에서 적극책을 쓰기 시작했다. 선왕(先王)인 문제는 국도(國都)와 장안(長安)으로부터 황하에 연결하기 위한 운하(運河), 광통거(廣通渠)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양제의 시대가 되니 지나의 하천이 모두 서(西)에서 동(東)으로 흘러서 바다로 향하기 위해 남북간(南北間)의 교통이 불편(不便)하다고 해서 남북을 통하는 운하의 개삭(開削=깎아내는)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것은 생각해보면 혜안(慧眼)이었다.
양제(煬帝)의 운하개척(運河開拓)
수의 양제는 우선 황하와 회수를 연결하는 통제거(회수:淮水)와 양자강(揚子江)을 연결해서 강도(江都)에 도착하는 한구(邗溝)를 개척하고 다음으로 황하로부터 북경(北京)방면에 이르는 영제거(永濟渠)를 완성했다.
더욱이 양자강으로부터 항주(杭州)에 달하는 강남하(江南河)를 깎아(開削)낸 서기 610년 이러한 운하는 모두 5개월 안에 완성하려고 남녀100만 명 이상을 동원해 굴삭(掘削)하게 했으나 그 전 길이는 1800km에 달하는 폭(幅) 30m~50m의 장대(壯大)한 스케일의 것이었다.
수대(隨代)의 운하는 함북간의 교류를 바로 촉진시켜서 경제발전에 일층 기여했으나 양견과 2대(代) 양제의 참 목적은 중앙집권정치에 철저이며 조세증수(租稅增收)를 위해 교통로의 확보와 군대이동(軍隊移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해 회수 중유역(中流域)에 있었던 제도(帝都) 대흥(大興)과 배도(陪都:낙양)에는 전국으로부터 정보(情報)와 물자(物資)가 들어와 통일 지나의 지배(支配)가 용이(容易)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看過)해선 안 되는 것은 당시는 고대토목공사(古代土木工事)이기 때문에 연간(年間)을 통해서 배의 운항(舟航)은 곤란(困難)해서 우기(雨期)에는 물의 흐름이 급하다든가 겨을과 봄의 갈수기(渴水期)에는 물이 부족하다든가 해서 때때로 배의 운항을 할 수 없게 하였다.
더욱이 황하로 부터는 대량(大量)의 니토(泥土)가 집적(集積)하는 등의 결점(缺點)이 있어서 그 때마다 주변(周邊)의 주민이 수복작업(修復作業)에 동원되었다.
양제의 대사업은 여기에 끝이지 않고 매달 200만 명의 사람을 동원해서 낙양에 동도(東都)를 건설하는 것 외에 각지에 이궁(離宮)의 조영(造營)과 기마민족(騎馬民族)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萬里長城)의 구축한 것은 이미 기술 했다.
그러나 여기서 부언(附言)하면 수를 건국한 양견도 척발부족(拓跋部族)과 고구려족(高句麗族)은 1세기경에는 유목(遊牧)과 수렵생활(狩獵生活)을 하는 이웃이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북주(北周)와 오랫동안 우호관계(友好關係)를 유지한 사이였다.
그런데 양견이 북주(北周)를 찬탈(簒奪)하였다는 일로서 수에 강한 적대감정을 갔고 있었다. 한편 양견 자신도 북방부족인 고구려가 전투에 강한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에 대해서는 늘 공포심과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가 주변 나라와 부족들을 통합하며 강해지자, 고구려에 조공을 요구하였다 이에 고구려가 응하지 않았다. 강력한 고구려가 조공에 응 할 리가 없다. 또한 수가 영토로 삼으려 한 요서지방(遼西地方)에 고구려의 군세(軍勢)가 들어가자 지나의 채면을 위해서도 고구려를 징벌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고구려 원정(遠征)은 수(隨)의 멸망 초래
수의 문제는 해륙(海陸)을 합쳐 30만의 대군(大軍)으로 원정(遠征)을 하였으나 수군(隨軍)은 고구려군(高句麗軍)에 대패해서 살아남은 자는 10중 8~9명에 불과 할 정도로 손해가 컸다. 30만 대군을 보내고도 이기지 못한 최대의 이유는 무엇이었나?
여기서 예맥이 동주시대부터 한무제(漢武帝時代)까지도 1000년간 지나(支那:中國)를 정벌하고 정복하며 지배해온 전법(戰法)인데 반해 수군(隨軍)은 보병전법(步兵戰法)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기병(騎兵)은 오늘의 전차(戰車)에 필적할 정도의 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隨)의 양제(煬帝)는 서기 604년에 부(父:文帝)를 살해해서 수(隨)를 계승한 자다. 그는 612년 복수를 하기위해 제1회의 원정군을 보낸다.
이 때 원정군의 진용(陣容)은 해륙(海陸)으로부터 113만 명, 수송부데(輸送部隊)로서 200만 명이 되는 대부대(大部隊)였으나 고구려군(高句麗軍)을 이기지 못하고 이때도 살아온 자가 10명 중 2~3명이라는 참담한 패배를 당해 철퇴(撤退)하였다.
수(隨)는 그 이듬해에도 제2차 원정군(遠征軍)을 보냈으나 중신(重臣) 양현감(楊玄感)에 의한 반란(反亂)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사기(士氣)가 높은 고구려군(高句麗軍)에게 격퇴되는데, 양제(煬帝)는 2회의 실패에도 3회 원정을 강행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에 3회에 걸친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자 중세(重稅)에 신음하는 농민과 호족(豪族)이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은 3개월 만에 진압(鎭壓)되나 이 사건은 양제(煬帝)에게 큰 충격을 안겨줘서 반란이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동돌궐(東突厥)은 수(隨)가 번번이 철퇴하는 것을 보고 수(隨)와의 화의(和議)를 깨고 반기(反旗)를 들고 침입해 왔다. 여기서 동돌궐(東突厥)이란 585년에 동서로 분열한 돌궐(突厥)의 한 편으로 수(隨)가 성립할 당시 돌궐과 화의가 체결되어 있었다.
양제(煬帝)는 바로 대군을 이끌고 결전(決戰)에 임했으나 역으로 포위(包圍)돼 부하 이세민(李世民)에 위기를 모면하게 되는 처지가 되어 위험을 감지한 양제(煬帝)는 616년에 장안(長安)을 떠나서 남쪽의 강도(江都) 양주(楊州)로 향(向)한다.
그러나 양현감(楊玄感)의 반란(反亂) 발생 이래 반란은 전국에 미쳐서 그 수는 200건을 넘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군웅(群雄) 중에 한사람이 태원(太原)에 있었다. 그는 이연(李淵:565년~635년)과 그의 식자(息子) 이세민(李世民)이 617년 진양(晋陽)에서 병(兵)을 일으켜 일직이 장안(長安)에 입성(入城)해서 이곳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
양제(煬帝)는 618년에 그 비(妃)와 어린자식들 다 같이 호위병사(護衛兵士)에 의해서 살해(殺害)돼 수(隨)는 건국 후 겨우 37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이는 고구려의 침공이 원인이었다. 그런데 618년 이연(李淵) 부자(父子)가 당(唐)을 건국하기에 이른다. (以上은 ’崔仁 ‘[韓國學講義]’, 김세환,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132~141面. 貝塚茂樹, ‘中國の歷史’.48面~55面. 三省堂 編修所 編 ‘[世界史の 整理]’ 그 外에 많은 書冊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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