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 제국(帝國)과 정관(貞觀)의 치(治)

입력 2020-01-31 21:37:00

원문 링크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교수
지나
(支那;中國)는 고대사를 자기 나라에 유익하게 조작하려고 하나 지금은 그런 왜곡이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맥이 동주시대부터 한무제(漢武帝)시대까지 중국을 지배한 것을 숨기기 위해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하나 그들은 한사군 지역도 밝히지 못한다.
 
한사군은 그 내막을 조사해보면 껍데기만 있고 내용은 없다는 것이다. 서기전 108년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있던 위만을 치고 그 자리에 한사군을 두었다고 하나 이는 기록일 뿐 사실은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한 한사군 지역을 25년 후 임둔, 진번을 당시 예맥이 서기전 82년 흡수했고 현토는 축소된 것임을 이미 논한 바 있다.
 
()나라가 넓은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돼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너무 허구가 많다. 한사군은 한나라가 지배한 것도 아니며 또한 한사군이 감히 우리를 지배했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 지역은 유명무실한 지역으로 예맥이 지배한 곳이다.
 
실제 예맥(銳麥;濊貊) 조선이 지배권자로서 법적지위를 갖고 있으며 최태영(崔泰永) 선생도 우리가 지배권자라고 말하고 있다한국고대사 49~53) ‘삼국지(三國志)’에는 예맥인의 수가 많아서 어찌할 수 없다(개기종야(皆其種也)라고 나와 있는데 종래 한사군(漢四郡) 반도설(半島說)은 국내 학자들이 아무 논증(論證)없이 받아들인 것 뿐이다.
 
정인보(鄭寅普) 선생은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에서 평양에서 나왔다고 일인(日人)들이 한나라의 유물이라는 봉니(封泥)’의 위조설과 점재현신사비의 정체(正體)를 명쾌하게 파헤쳐 한사군이 평양지역에 있었다는 일본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최동(崔棟) 선생도 조선상고민족사(朝鮮上古民族史)’에 한사군(漢四郡)은 반도에 없었다고 했다. 이 당시는 예맥과 돌궐(突厥)이 강한 때라 후한의 광무제(光武帝)는 서기 30년 낙랑군동부도위의 관직을 폐하고 영동7(嶺東7)을 완전히 포기할 정도이다. (최동 조선상고민족사(朝鮮上古民族史’ 420~421, 546~58)
 
일본의 진정한 신사(紳士)이자 최고 권위의 동양사학자로 히로히토 왕세자(王世子;昭和王) 시절의 스승이었던 사사가와 림푸(笹川臨風) 박사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만든 조선사편수회에 도우러 왔다가 이마니시 류(今西 龍) 일당의 있지도 아닌 역사 왜곡과 조작 소리를 듣고 2~3일 만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우리나라 역사를 가장 적극적으로 왜곡하기 시작한 당의 건국과 당태종(唐太宗)이 서돌궐(西突厥)과 토곡혼(吐谷渾), 티베트 등을 평정한 후 고구려와의 세 차례 전쟁과 그의 정관(貞觀)의 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당나라는 어떻게 건국한 나라였나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역사를 논하려면 빼놓을 수 없는 나라 중 하나가 당나라이다. 이 당()나라는 중원(中原)의 강국인 백제가 신하의 배신(背信)과 고구려의 남생, 남건의 내분(內紛)으로 나당(羅唐)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 것은 그대로 넘길 수가 없다.
 
()은 이미 다 주지(周知)하는 바와 같이 수양제(隋煬帝) 사후 지나 전 중국에 걸쳐 활거한 정권 간에 전투가 계속되었다. 서기 611년에 시작한 대반란은 산서(山西) 태원(太原)에 거병한 당()의 고조(高祖;이연(李淵))에 의해서 서기 618년 건국(建國)됐으며 멸망(滅亡)907년으로 289년동안 존립(存立)한 나라다.
 
당 건국에 가장 공적(功績)이 컸던 사람은 당을 세운 고조(高祖;이연(李淵))의 차남인 이세민(李世民)이었다. 그는 각 지방의 군벌(軍閥)을 타파(打破)했다. 이에 인기가 높아져 다수의 명사(名士)와 투장(鬪將)이 모여들자 이를 지켜보던 큰형 태자(太子;建成)는 아우 원길(元吉)과 은밀히 이세민(李世民)을 배제(排除)하고자 했다.
 
이러한 태자와 아우가 자신을 배제(排除)하려는 것을 탐지(探知)한 이세민은 장안(長安) 궁성(宮城)의 현무문(玄武門)에 군대를 대복(待伏)시켜 태자와 아우(元吉)의 음모를 넘어뜨리고 형과 아우를 제거한다.
 
이에 고조(高祖)는 이세민(李世民)을 세자(世子)로 세워 얼마 지나지 않아 퇴위(退位)해 태상왕(太上王)이 되고 627년에 이세민(李世民)이 태종(太宗)이라 하며 즉위한다. 이가 바로 지나(支那;中國)역사에 지대한 공적을 남긴 당태종(唐太宗)이다.
 
이 당태종은 22년간 재위했으나 그는 후세의 사람들로부터 이상적인 군주(君主)로서 그 영걸(英傑)이라고 말해지고 그의 치세(治世)는 그가 다스린 원호(元號)인 정관(貞觀)을 취해서 정관(貞觀)의 치()’라고 말해져 그 후의 황제(皇帝)의 모범(模範)이 되었다. 그러나 당태종(唐太宗)에 대한 평가(評價)는 두 가지로 나오고 있다.
 
하나는 이세민(李世民)이 그의 부(), 당고조(唐高祖))를 퇴위시켜서 유폐(幽閉)하고 자신에게 위해(危害)를 주려던 형()인 태자와 아우 원길을 죽여서 재위(在位)를 찬탈(簒奪)한 외에 아우의 비()를 자신의 비로 한 이세민(李世民)에 있어서는 어떠하든 성황(聖皇)이라고 선전할 필요성이 있어서 그를 2대의 황제(皇帝)로 영웅(英雄)이라고 선전(宣傳)하고 기록에 남길 필요성이 있었다.
 
비인도적(非人道的)인 행위에 의해서 제위(帝位)에 오른 당태종에 있어서는 스스로 군주(君主)로서의 자세를 보이지 않으면 국가는 붕괴하는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주변국가를 침략해 정복했던 것이다.
 
그는 국내에서는 정치적 통일을 하고 제제도(諸制度)를 정()해서 문물(文物)을 흥하게 하며 대외적으로는 그들이 말하는 이적(夷狄)을 물리치고 영토를 넓혀서 국위(國威)를 높였다는 평가를 기대했던 것이다.
 
또한 외교에서는 동동궐(東突厥)에서 내분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이 나라들을 공략(攻略)해서 동동궐(東突厥)을 멸()하였다. 한편 터키계() 유목민(遊牧民)인 위구르(回鶻)는 전 몽골을 지배하게끔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640년에는 서역(西域)의 중계무역시지(中繼貿易基地)로서 번영하고 있는 고창(高昌)이 서역교통로(西域交通路)를 방해할 것으로 보고 이 고창(高昌)을 멸하였다. 더욱이 645년에는 고구려(高句麗)40만 군세(軍勢)를 이끌고 원정(遠征)3년간에 걸친 원정을 하나 대륙 패자(覇者)인 고구려군(高句麗軍)에 위해 원정(遠征)은 매번 실패한다.
 
그러나 당()은 계속해서 서기 657년에는 서역(西域)에 원정(遠征)해 숙원(宿願)의 서돌궐(西突厥)을 멸() 한다. 또 청해(靑海), 신강(新疆), 감숙(甘肅)방면에 거주하며 때때로 당()에 침입을 계속하고 있었던 토곡혼(吐谷渾)과 티베트계의 당항(党項)을 치고 라사를 중심으로 하는 티베트족의 토번(吐藩)을 격파해 이와 혼인관계를 맺어 서방(西方)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기도 하였다.
 
()의 정관(貞觀)의 치()는 빛났다
 
당태종(唐太宗)은 고구려에의 원정은 실패하나 모범적인 정치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모범이라고 하는 당()정관(貞觀)의 치()’라는 것은 서기 627~649년까지의 당태종(唐太宗)의 치세(治世) 칭()하는데 지나의 왕조사(王朝史) 중 황금시대(黃金時代)를 이루었다고 하고 있다.
 
수말(隨末)의 전후(前後) 18년의 대란(大亂)의 뒤를 이어서 매우 황폐한 북지나(北支那;中國)의 경제를 재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유망(流亡)한 인구는 수대(隨代)에 많을 때 25%에 불과했다. 통일 후 125년이 경과한 현종(玄宗;天寶13=서기753)이 되어서 겨우 수시대(隨時代)의 호구(戶口)에 돌아올 수 있었다.
 
태종의 정관(貞觀)의 치()’는 학식 있는 자를 모이게 해서 경제 부흥의 문제를 자문(諮問)하였다. 수말(隨末)전후 대란에 가난한 백성들은 평화롭고 풍요한 생활에 익숙한 백성에 비하면 고난생활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통치하기 쉽다는 위징(魏徵)의 말에 용기를 얻어 수()와 같은 강제에 의해서 조급히 취급하지 않고 재건계획을 물심양면에 걸친 모든 것을 하나하나 세워서 실현해 갔다.
 
그 당시 무엇보다도 중시한 것은 국민의 모랄(moral)의 수립(樹立)이고 그 결과 정관시대(貞觀時代)는 무엇보다도 유교적(儒敎的)인 도덕정치의 면에서 이상적시대(理想的時代)이었다. 뛰어난 군인이었던 태종(太宗)은 즉위하자마자 교양있는 정치가가 되려고 계획적으로 실천해 갔다.
 
그는 궁중(宮中)의 홍문전(弘文殿)20여 만권의 서적을 마련하고 우세남(虞世南)을 비롯해서 주로 남조(南朝)의 문화인(文化人)에 홍문관(弘文館) 학사(學士)를 겸()하게 해 순번으로 숙직(宿直)시키며 역사상의 인물과 현대정치에 관해서 의견을 나누게 했다.
 
당태종은 문화적으로는 남조(南朝)의 세련된 미적인 문화를 동경하여 특히 우아한 진()의 왕희지(王羲之)의 글에 심취해 그의 대표작 난정서(蘭亭序)’를 자신의 묘()에 묻도록 유언을 할 정도로 그의 전통을 전한 우세남(虞世南), 구양순(歐陽詢)을 중용(重用)하였다.
 
그러나 북조계(北朝系) 군벌(軍閥)의 실용주의 속에 선 태종은 유교를 경시한 수문제(隨文帝), 강남의 사치생활에 빠져 농민의 반란을 맞게 한 양제(煬帝)의 실패를 거울삼아 정치의 기초를 유교 도덕사에 두어 스스로 엄격히 질소(質素)한 생활을 보냈다.
 
당태종의 정치가로서의 장점은 첫째 천재를 발견해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두어서 재능을 잘 발휘하게 한 것이다. 그의 인사(人事)는 재상(宰相)으로서 두여회(杜如晦방현령(房玄齡), 고문(顧問)으로서는 위징(魏徵왕규(王珪), 군장(軍將)으로서 이적(李勣이정(李靖)을 두고 있다.
 
둘째 장점은 충신(忠臣)의 충고를 잘 받아들인데 있었다. ()의 율령국가제 (律令國家制)를 받아들인 당 제국은 법제를 더욱 완비(完備)한 시대였다.
 
태종은 율((() ()4()로 된 법제로 된 아시아의 민족주의(民族主義)를 지향하여 독립국가를 지향하는 제국(諸國)에 모범이 되었다.
 
당태종의 인품(人品)정관의 치
 
당태종은 자신이 발표한 조칙(詔勅)에 부당한 점이 있으면 그 문하성(門下省)의 하역급사중(下役給事中), 황제를 모시고 있는 황문시랑(黃門侍郞)은 조서(詔書)의 결점(缺點)의 수정(修正)에 노력할 것을 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정치의 전당(殿堂)인 정사당(政事堂)에 모이는 정규(正規) 삼성장관(三省長官;中書省, 門下省, 尙書省)외에 여러 고관(高官)에 같은 중서문하삼품(同 中書門下三品) 평장사(平章事)등 여러 명의(名義)를 본관(本官) 위에 더해 의사(議事)에 참가하는 자격을 주어 차질 없는 정치를 지향했다.
 
당태종은 이 정사당(政事堂)의 회의에 천자(天子)에 그 결점(缺點), 정치 실패에 관해서 간관(諫官)을 참가시켰다. 대표적인 사람이 태자(太子;建成)의 모신(謀臣)이었던 위징(魏徵)이다. 그는 태종(太宗)의 기분에 상관없이 대담하고 솔직하게 태종의 실책(失策)을 지적했고 태종도 결국 자기의 잘못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본질적으로는 제약하는 다른 권력을 갖지 않은 지나의 전제 군주제를 하는 왕조국가(王祖國家)에서는 군주(君主)가 결정권을 가지면서도 학식을 갖춘 유능한 고급관료의 의견을 흡수해서 자기과실(自己過失)을 자신이 보정(補正)해 제어하는 기관을 유효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태종은 이 점이 훌륭했다.
 
또한 당태종은 직접적으로 백성과 접촉하는 지방관(地方官)을 중요시 했다. 예컨대 주()에는 자사(刺史)를 두고 현()의 영()을 통솔했으나 전국자사(全國刺史)의 성명을 좌우의 평풍(屛風)에 열기(列記)해서 언제나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더욱이 지리(地理)의 형세(形勢)에 의해서 전국을 10()의 지구(地區)로 나눠서 순찰사(巡察使)에게 감독하게 하였다. 이렇게 정비(整備)된 중앙과 지방관리(地方官吏)에 어떠한 사람을 임명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이었다.
 
지나의 왕조국가(王朝國家)에서는 관리임명(官吏任命)을 선거라 부르고 있다. 바른 선거에 의해서 각기 관리(官吏)에 적합한 재능인(才能人)을 보면 이상적인 정치가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교(儒敎)를 국교와 같이 위치에 둔 한왕조(漢王朝)는 주군(州郡)으로부터 품행이 우수한 자 소위 현양방정(賢良方正)의 인재를 추천하여 황제가 이를 문제를 줘서 답안을 쓰게 하여 이에 의해서 관리를 임명했다.
 
후한말경(後漢末傾)부터 지방군벌(地方軍閥)이 할거(割據)해 서로 교전상태가 계속되니 이 시문제(試問制)가 행()할 수 없어서 이에 대신해서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주군(州郡)에 인망(人望)있는 자를 추천하는 제도를 중정(中正)이라는 관()을 붙여서 이를 구품(九品)으로 나눠서 독특의 인재를 중앙에 추천하는 제도인데 이를 원용했다.
 
(), (), 남북조(南北朝)를 거쳐서 지방의 귀족무리(貴族群)의 군벌(軍閥)이 고정화(固定化)되어 출신이 좋지 않은 자는 추천이 되지 않게 되었다. ()나라는 귀족 고관세습제를 없애기 위해 구품중정(九品中正)의 추천을 폐해서 선거제로 정했다.
 
()은 이를 받아들여 중앙과 지방의 학교에 출신자, , 생도(生徒)를 주()로부터 추천하여 향공(鄕貢)을 매년(每年) 상서성(尙書省)에 모여서 시험을 행하고 합격자가 관리(官吏)로 임명(任命)되었다. 이 시험은 여러 과목에 나눠서 있기에 과거라 불렀다.
 
글을 맺으며 - ()의 과거제도(科擧制度)
 
()의 과거(科擧)는 명경과(明經科)와 진사과(進士課)가 있는데 특히 진사과에 지원하는 자가 많았는데 명경과(明經科)는 오경(五經), 즉 역(), (), (), 삼례(三禮;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삼전(三傳)’, 즉 좌씨(), 공양(公羊), 곡양(穀梁)에 관해서 기억시험이고, 진사과(進士課)는 시사문제에 관한 작문시험이었다.
 
또한 용모(容貌)가 훌륭하고 언어(言語)가 명확(明確)한가, 답안(答案)이 아름답게 작성(作成)하고 있는가 논리(論理)가 서고 있는가 등에 의해서 채점(採點)되었다고 한다.
 
귀족적인 교양이 매우 중시되고 있었으나 구 귀족(舊貴族)에 의한 전제정치(專制政治)를 타파하고 중소지주(中小地主)의 자제(子弟)에 진출의 기회를 주었다. 또한 문학적인 재능이 의한 진사시험의 출신자는 다음 고종시대 이후 점차 정계를 점하게 되었다. 고급관료나 귀족은 이 시험제도에 의하지 않고 자제를 관리에 추천 할 수 있는 특권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과거출신자에 의해서 물러나게 되어갔다.
 
당시 유럽에서는 게르만민족이동이 끝나고 중세적인봉건제후(封建諸侯)의 활거가 시작한 6세기에 있어서는 지나에서 귀족세습에 대신해서 유교정신의 배경위에 시험에 의한 관료의 임명제도가 된 것은 놀라운 진보라 볼 수 있다.
 
한편 북지나(北支那;中國)의 파괴된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농민의 정착을 위해 전란으로 인하여 무주(無主)의 경지(耕地)가 그대로 있어서 이 땅을 농민에게 분배해서 농업생산을 높이고 그들에게서 세금을 거둬 국가재정(國家財政)을 안정시켰다.
 
이러한 의도하(意圖下)에서 후위(後魏)가 창설하여 북조의 전통이 되어 있었던 균전제(均田制)를 실시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수말(隨末)18년 내란(內亂)에 의해 흩어졌던 농민들은 이 균전법(均田法)의 실시에 의해서 안심하고 본적지에 복귀하게 되었다.
 
어떻든 당태종(唐太宗)의 정관시대(貞觀時代)는 지나의 관제의 정비(整備), 균전제(均田制) 등 획기적인 정치와 문물을 발전시킨 공로는 지나 역사에 길이 모범이 되고 있다
 
(以上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30~60. 김세환,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유우찬,‘한국사의 쟁점’ 41~75. 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貝塚茂樹,‘中國歷史’.56~69. 杉山徹宗,‘眞實中國四千年史많은 書冊參照하고 本文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이을형 필진페이지 +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3
감동이에요
0
화나요
0
슬퍼요
0
댓글 : 6